'분통'을 터뜨리다, '겸손'을 배우다

한 젊은 유권자의 지방선거 소회

등록 2010.06.03 20:51수정 2010.06.03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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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던 지방선거가 끝났다. 당선자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낙선자들은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었을 테다. 노무현, 천안함, 정권심판, 전 정권심판 등등 많은 이슈들과 구도들이 만들어지면서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선거가 마무리 된 것 같다.

 

참으로 국민 무서운 줄 모르고, 국민을 우습게 보는 정권과 사람들을 혼내주었다는 의미에서 뜻깊은 선거였고, 민심이 경이롭고도 두려운 것이라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느낀 선거였다. 지방선거 하루가 지난 지금, 어떤 거창한 구호들이나 이슈들보다 지방선거를 치른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나에게 남는 키워드는 '분통'과 '겸손'이다.

 

분통

 

지방선거 기간내내 나는 분통이 터졌다. 물론, 그걸 티를 내거나 사람들에게 내보인 적은 많이 없었지만 나는 분통터지는 마음을 가눌길이 없었다. 내가 분통이 터졌던 중요한 이유 두 가지는,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와 '우리'를 위해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태도 때문이었다.

 

나는 서울에 살기 때문에 서울시장 선거를 눈여겨 보게된다. 모든 토론회를 빠짐없이 시청한 것은 아니지만 후보간 토론을 챙겨보았다. 나는 거기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현직 시장의 오만과 가식 그리고 예의없는 태도를 보고 분통이 터졌다.

 

구체적인 예산과 통계의 수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인양, 그는 여러가지 숫자와 통계들을 들이밀며 '너네들은 이런것도 모르면서 무슨 시장을 하겠다고'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나의 선입견과 편견이 있어서 그렇게 보았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내가 그에게 받은 인상은 명확했다.

 

그는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흥분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벌이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친절하고 조리있게 말했다. 참 잘생겼고, 참 말도 잘하는데 거기서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좋은 인상과 이미지로 먹고 들어가려는 그 가식이 눈에 훤히 보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통계를 잘 알고 있는 게 무슨 시장의 제1자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러저러한 수치를 물어보면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상대후보에게 "서울을 사랑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라는 해괴한 질문으로 오만함을 제대로 보여주는가 하면 상대후보들의 공약은 시정을 잘 모르고하는 이야기라면서 자기만 시정에 대해서 잘알고 있는양 말했다. 그 오만과 가식, 정말 분통이 터졌다.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잘 생기기고, 말도 잘하는 현직시장에게 더 좋은 가치와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야권의 유력후보가 너무 토론을 못하는 것도 화가났다. 저렇게 가식적인 걸 토론에서도 철저하게 훌륭한 언변과 논리로 눌러주었으면 좋겠는데, 사람이 너무 좋아서인지 준비가 너무 안되어 있어서인지 속수무책 당하는 걸로만 보였다. 이게 나의 생각만은 아니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현직 시장의 오만과 겉치레식의 가식을 알아 본 모양이다. 아마도 여유있는 승리를 확신했던 그는 밤새 간을 졸이며 끙끙 앓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내가 분통이 터졌던 것은 '우리'를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사람들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였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던 한명숙과 노회찬 두 사람 모두 어두웠다는 말로도 충분치 않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암흑시대에 감옥에 가고, 가난하게 살고, 혹독한 시련을 겪는 것을 감수하며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물론, 그 사람들의 과거를 이유로 지금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지금이 그들의 과거를 훼손하지 않는 연장선상에서 살아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모른 채 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그들의 현재를 떼어놓고라도 그들의 과거에 대해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은 가져야 한다.

 

하지만 계속되서 발표되는 여론조사,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이들의 삶을 기억하거나,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모두가 신음할 때에도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똑똑한 머리를 굴리면 공부한 잘 생긴 사람을 선호하고, 오히려 우리를 위해 고생한 사람들을 과격하거나, 현실을 모르거나, 퇴출되어야 할 정치인으로 치부하는 상대방 후보의 태도와 여론조사 결과들이 보였다. 나는 그래서 분통이 터졌다. 저 사람들이 왜 사서 고생하면서 그렇게 살았을까, 그렇게 산다고 무슨 보람이 있는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분통은 '겸손'을 배우는 것으로 정리됐다.

 

겸손- 민심, 그 경이로움을 경험하다

 

6시되고 방송 3사가 공동으로 조사한 출구여론조사 결과가 공표되었다. 그야말로 흥분되는 결과였다. 한명숙-오세훈 경합, 김문수-유시민 경합, 김두관-이달곤 경합, 이광재-이계진 경합, 곽노현-이원희 경합 등등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현실로 펼쳐졌다.

 

이러한 출구조사 결과는 거의 대동소이하게 실제로 연결되어서 나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정부를 심판하고, 국민들의 성난 민심을 표출하는 선거가 됐다. 지금의 권력자들에게만 겸손을 배우게하는 선거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번 선거가 어느 누구도 빠짐없이 모든 정치세력과 정치인에게 겸손을 요구하는 민심이 나타난 선거였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승리했으나, 실제로는 졌던' 야당의 수도권 선거가 이를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민심의 경이로움 앞에 '겸손'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왜 공동체를 위해 고생한 사람들, 그리고 정책적으로도 더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을 왜 국민들이 몰라주나 하는 분통은 민심이라는 바다를 보지 못한 나의 좁은 생각이었다.

 

민심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했고, 정의로웠고, 현명했고 또 사랑스러웠다. 다들 힘주고 성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모두가 보편적인 생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배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빠서 세상돌아가는 거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돈만 아는 것 같다고 내심 무시하고 경멸했던 그 국민들이 그리고 나의 주위 사람들이 모두 선거권을 가진 주체적인 시민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의사를 결정하고 의미있게 한표를 행사할 수 있는 민심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이명박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국민의 경고를 통해 겸손함을 배웠을 것이다. 아니 배워야 한다. 그들이 이런 선거의 결과 앞에서도 배우지 못한다면 그들 스스로에게 불행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남의 겸손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겸손해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분통을 터뜨려야 했던 대상은 내가 혼자 깔보고 무시했던 그리고 서운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 같아도, 사람들이 정의로운 선택을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아무도 관심이 없어 세상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도 민심이라는 경이로운 존재는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몇 번의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했지만 이토록 민심의 경이로움을 가장 선명하게 체험한 것은 이번 지방선거가 최고일 것 같다. 민심은 참 두렵고도 경이로운 것이다. 그러기에 정치인들이 뚜벅뚜벅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실력을 연마하면 국민들이 알아줄 것이다.

 

맷집- 하나 더 배우다

 

분통과 겸손에 더해 배운 게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맷집이다. 이번 지방선거의 가장 의미있는 결과는 김두관 경남도지사의 탄생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기적이고, 사건이다.

 

한나라당과 차별화되는 정치적 입장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 그야말로 한나라당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에서 광역단체장으로 선출되는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당선소감에서 "지역주의 타파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8할의 일을 했다면 나는 2할의 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어쩌면 실제로 경상도에서 당선된 그가 더 큰 진전을 이루어낸 주인공이라고도 생각한다.

 

어쨌든 노무현으로부터 원칙과 소신을 버리지 않고 지역주의에 맞섰던 진정한 정치인들이 이렇게 하나 둘 성과를 내는 것은 정말 기쁘고 훌륭한 일이다. 나는 그런 김두관에게 '맷집'을 배운다. 그는 경상남도 지사 선거만 3번째 도전끝에 승리를 일구어냈다. 그는 군수, 국회의원, 도시사 선거에 모두 8번을 나왔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군수 두번과 이번의 도지사 선거 승리가 승리의 기록이라고 한다.

 

이처럼 계속되는 설움과 낙선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던 그의 맷집이 나는 승리의 1등 공신이라고 생각한다.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다운이 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일어나 링 위에서 싸웠던 그 맷집을 나는 무슨 일을 하든 그에게서 배워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권오재의 블로그 '오재의 화원'(http://vacsoj.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2010.06.03 20:51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권오재의 블로그 '오재의 화원'(http://vacsoj.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지방선거 #한명숙 #선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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