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정측면으로 보면 중앙 후편에 중재실이 한칸 있음을 알 수 있다. 송강은 이곳에서 그 유명한 사미인곡을 지었다.
하주성
그는 고향인 창평에 내려와 머물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을 지어냈다. <사미인곡>은 조정에서 물러난 정철이,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여인이 남편과 이별하여 사모하는 마음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라고 한다. 이곳 송강정에서 정철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고졸한 송강정은 숲을 해하지 않아 송강정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규모로 꾸며졌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앞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아마 송강정이라고 하기 이전에 죽록정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 이름을 잊고 싶지가 않았는가 보다. 주추를 보니 동그렇게 다듬은 돌 위를 평평하게 만들고 기둥을 올렸다. 예전에도 이랬을까? 그저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의 정면에서 보면 중앙 뒤편으로 한 칸의 중재실을 달아냈다. 아마 이곳에서 4년이란 세월을 묵으면서, 송강은 사미인곡을 집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마루에 걸터앉아 본다. 앞으로 난 길을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들린다. 아마 예전에는 저곳으로 소를 끈 농부가 지나고, 급하게 말을 몰아 달리던 파발이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송강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임금을 더 그리워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