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두에 있는 두보초당
최오균
청양궁에서 노자의 흔적을 찾아보고 두보초당으로 향했다. 35번 버스는 바로 두보초당 앞에서 내려 주었다. 시인의 초당은 한가로웠다. 5월의 신록이 우거진 두보초당은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출렁거리고 있었다.
이태백(李太白)과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일컫는 두보(杜甫 712-770)는 허난에서 태어나 20세에 중국을 보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중국을 유람하던중 두보는 744년 때마침 장안의 궁정에서 추방되어 산둥 성으로 향해가고 있던 이백과 뤄양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이백의 천재적인 풍격을 사모하던 두보는 이백과 함께 양송(梁宋 : 지금의 허난 성) 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 여기서 이백 외에 시인 고적(高適)·잠삼(岑參) 등과도 알게 되어 함께 교우를 하며 시를 지었다.
그해 겨울 이백과 헤어진 두보는 강남(江南)으로 향했고 그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보는 오랫동안 이백을 사모해서 종종 그를 꿈속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는데 사흘 밤이나 계속해서 이백을 만나는 꿈을 꾼 후 지은 것이 〈몽이백이수 夢李白二首>란 시이다.
장안에 도착한 그는 약 10년 동안 과거시험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계속했다. 두보는 명사고관의 집을 드나들고 시문을 조정에 바쳐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했으나 임용되지 못했다. 754년 두보는 처음으로 금위군의 무기고 관리로 정8품 하(下)라는 가장 낮은 관직을 얻어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안사의 난'으로 기약없는 방랑길에 올라그러나 755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은 두보에게 또 다시 기약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한다. '안사'라는 이름은 난을 이끌었던 '안녹산과 사사명'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양귀비에 빠진 당현종은 정치를 환관들에게 넘겼고,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의 길을 걸어갔다. 환관과 외척들의 부패와 권력다툼은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되었다.
8년간이나 지속된 참혹한 전쟁으로 많은 농민들이 죽고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 전란으로 인구는 13년 전에 비해 890만호에서 293만호로 70%가 감소되었다. 597만호가 사라짐으로써 한 호당 5인 기준을 삼아도 3천 만 명이 넘게 죽었던 것이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최악의 잔혹한 전쟁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春望(춘망)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성안은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네 感時花淺淚(감시화천루) 시대를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한 맺힌 이별에 나는 새도 놀라는구나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봉화불은 석 달이나 계속 오르고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집에서 온 편지 너무나 소중하여라 白頭搔更短(백두소갱단)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 짧아져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도 못 꼽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