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대비(명성왕후)와 현종의 무덤인 숭릉. 사진은 숭릉의 정자각. 정(丁)자 모양으로 생긴 정자각(丁字閣)은 죽은 이를 위한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 안에 있다.
동구릉 홈페이지
멀쩡하던 명성대비가 갑자기 죽은 이유를 이해하려면, 사망 직전인 숙종 9년(1683) 겨울부터 그의 행적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숙종 9년(1683) 10월 13일자 <숙종실록>에 따르면, 쌀쌀한 음력 10월인 그 당시에 한성에서는 두질(痘疾, 마마)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명성대비는 한글 하교를 내려 임금을 보호할 금표(禁標)를 설정하도록 하는 한편, 전염병이 임금에게 옮겨지지 않도록 일부 백성들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고자 했다. 여기서 '금표'는 임금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영역이었다.
'초겨울에 백성들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면 자칫 동상에 걸릴 수도 있다'는 판단에 기초하여 숙종은 백성들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지 말도록 하는 대신에 금표만 좀 더 확장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어머니의 하교를 절충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여기서,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한글 하교를 내린 일이나, 스물세 살의 젊은 아들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한 일을 볼 때, 음력 10월 13일 당시의 명성대비에게는 특별한 건강상의 문제가 없었다고 판단해도 될 것이다.
8일 뒤인 10월 21일자 <숙종실록>에는 의사들이 숙종을 진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마마 전문의'인 두의(痘醫)가 출동하는 한편, 7인의 의사가 궁궐 약방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숙종도 전염병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도 명성대비는 멀쩡했다. 10월 21일자 실록에서는, 아들의 간호를 위해 또 다른 하교를 내리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는 명성대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전염병이 진정된 이후의 기록인 11월 1일자 <숙종실록>에서도 명성대비가 여전히 사후 처리를 주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숙종이 마마에 걸린 이후로 대궐 약방에서는 육선(肉膳) 즉 고기반찬을 임금에게 올리지 말도록 했다. 아들이 마마에서 회복되자, 명성대비는 상선(常膳) 즉 평소 음식을 올리도록 하는 새로운 조치를 취했다. 명성대비만큼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들 건강 챙기다 건강이 급속도로 약화된 명성대비위와 같이 숙종이 마마에 걸리기 이전부터 회복된 이후까지 명성대비의 건강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이 시기에 명성대비는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는 한편 아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열성을 다했다. 건강이 담보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전염병이 멈춘 때로부터 3주 뒤의 문헌인 11월 22일자 <숙종실록>에는 아주 짤막하게 "왕대비(명성대비)가 불예(不豫)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성대비가 병에 걸렸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13일 뒤인 12월 5일(음력)에 명성대비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명성대비가 두질 문제에 개입한 날인 숙종 9년 10월 13일부터 병석에 누운 11월 22일까지 조선 왕궁에서 발생한 일들을 놓고 볼 때, 평소 적극적이고 활력적이던 대비의 건강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던 2가지 요인은 전염병과 과로였다.
이 중에서 전염병은 대비의 건강을 침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염병이 번질 때뿐만 아니라 진정된 후에도 대비는 건강을 잃지 않고 꽤 분주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로가 대비의 건강을 침해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전염병의 확산으로 보건환경이 악화된 음력 10월·11월의 쌀쌀한 날씨에, 마마에 걸린 아들의 건강을 챙기고 사태 해결을 진두지휘하는 과정에서 그의 건강이 급속도로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그렇게 생긴 과로가 결국 40대 여인의 급사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