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폰서도 물처럼 흐르고 흐른다면

15년 만에 만난 8촌 언니,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다

등록 2010.05.26 18:30수정 2010.05.27 13:3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촌수로 따지면 8촌인 내 친척언니를 통해 스폰서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매미 소리가 유난스럽던 어느 여름날, 오랜 이민생활을 정리하고 몇 해 전 입국했다는 먼 친척 언니께 전화를 넣게 되었다.


촌수만큼 나이 차이도 있기에 존칭이 자연스러운 언니.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따금 '난희'라는 이름, 얼굴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큰 키에 서구적인 이미지만은 또렷이 남아있었다. 서울에 있는 친척들과 대구에 남아있는 친척들의 소식통 역할을 한다는 약간의 사명감을 더해 안부인사도 드릴 겸 전화를 넣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형식적인 안부 인사와 실제론 기약 없을 만남을 기약하는 심심한 대화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통화를 하며 어쩌다 보니 며칠 뒤 언니를 찾아 뵐 것을 약속하게 되었다.

망우역 근처에 있는 언니네 학원으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전화를 끊고서는 '그래, 가까이 있으면서 찾아뵙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하며 약간은 가벼운 마음이었던 나는 그때 이 만남이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15년 만에 만난 8촌 언니, 그땐 몰랐다

언니를 보았던 때가 내가 울보 유치원 시절 즈음이었으니 근 15년 만의 재회였다.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000 영어마을'이라는 입간판을 바라보고 들어섰는데 마침 유치부 아이들을 데려다 주러 나가던 언니와 마주쳤다. 얼떨결에 근처 정류장까지 배웅을 함께 나가 마치 오래 알던 사이인양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언니 정말 오랜만이에요" 하는 말을 한마디 할 수 있었다.


학원으로 돌아와서는 '과연 저기 서있는 저 여자는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으로 요리조리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옆 친구들과 귓속말 릴레이를 펼치는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입가엔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한동안 벌 아닌 벌을 섰다.

그렇게 꼬마 친구들의 관심에 조금은 긴장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학원이 끝난 후 저녁을 먹으며 언니와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학원을 함께 꾸려나가고 있는 형부, 형부의 동생인 원장선생님, 나와 동갑으로 낮에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밤에는 작곡 활동을 하며 가수를 꿈꾸는 준영이라는 친구도 소개받았다.


방학인데 별 다른 계획 없이 혼자 이것저것 하고 있다는 내 말에 언니는 며칠 학원에 나와 보고 도움이 된다면 방학동안 학원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며 영어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영어를 하고 싶은 욕구는 있었으나 재정적, 심적 문제로 학원을 다니지 않고 있던 터라 감사히 받아들였다. 이렇게 나는 얼떨결에 훌륭한 스폰서가 생긴 것이다. 

언니와 함께한 근 2년이라는 시간동안 내 안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영어를 이야기해보자면 원래 애착이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생활 속에서 조금씩 즐길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영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옹알이를 했던 것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둘째는 나의 정서적인 부분의 발전이다. 서울에서 홀로 생활하며 전보다 많이 단단해 지는 내 자신을 보며 '나도 결국엔 무감각·무감동의 도시인에 불과하구나' 하며 씁쓸해 하고 있었는데 감정표현에 솔직한 아이들과 함께 장난치고 어울리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내 자신에게도 귀 기울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꿈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는데 조금 멋있게 말해 내 인생의 비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각종 공모전 수상, 영어점수 등의 스펙을 위해 바지런히 움직이는 일반 대학생들과 비교해 본다면 난 거친 바람과 높은 파도에도 가만히 멈춰있는 갯바위 같은 존재였다.

나는 무엇이든 그 필요성이나 당위성, 나만의 분명한 이유를 가진 후에 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아니 어쩌면 그런 핑계를 대며 느슨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의 나는 꿈이 없었고 꿈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할 사회적 성공이나 부의 축적에 크게 욕심이 없고, 대학에서 배우고 있는 전공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착이 없었기에 그저 '졸업 후 자그마한 회사에 취직해 적당히 돈 벌면서 내 주변사람들 돌보며 살아가야지' 하는 게 나의 꿈이라면 꿈이었다.

학원을 다니면서 내 안락한 정신세계의 평온함은 깨졌다. 학원의 기본 모토는 학업 성취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즐겁게 공동체 안에서의 자아를 확립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생각됐다. 일하는 당신들도 즐거움과 보람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문제풀이와 공부 노하우 전수 위주로 수업을 하는 타 학원들과는 달리 자체 개발한 놀이를 통해 아이들이 신나게 놀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히고 날씨 좋은 날엔 근처 망우공원으로 운동회를 하러 나가 신나게 뛰어놀기도 했다.

상담을 온 학부모에게 "쉬는 시간이면 저희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탁구, 당구, 브루마블, 철권을 하며 노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하며 묻는 학원이 절대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역사회와 연계해 학원생의 일정 비율을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로 유지하며 소리 없는 나눔을 꾸준히 이어가고, 회의를 할 때면 아이들의 인성적, 가정적 어려움까지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이상이 현실과 근접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고, 내 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머리가 숭숭 빠질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울상을 하고 멍하니 있는 내게 학원 식구들은 "괜찮아! 너무 조급해 말고 멀리보고 생각해"라며 따뜻하게 격려해주셨다. 지금도 정답을 찾아낸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내가 즐거우면서 세상에 도움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열망이 꾸준한 고민들로 이어지고 있기에 불확실한 미래지만 예전만큼 공허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도움 받은 걸 꼭 되갚아야 하는 건 아냐"

나의 스폰서는 이러한 정신적 지원만큼이나  물질적으로도 자취하는 나를 위해 꼭꼭 저녁 먹고 가라고 말씀하시며 간식도 살뜰히 챙겨주시고, 이따금 혹시 용돈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물어봐주시는 따스함을 잊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내 마음 한 구석엔 묵직한 빚이 쌓여갔다. 너무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받은 도움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생각을 하니 마냥 감사하며 넙죽넙죽 받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때론 도움의 손길이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심스럽게 이런 내 마음을 말씀드렸더니 언니는 환하게 웃으며 "꼭 도움을 준 사람에게 그걸 되갚는 것은 아냐"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받은 도움은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어지고 그렇게 도움은 돌고 도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동안 품고 있던 마음의 짐이 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언니에게 직접적으로 마음의 빚을 갚아나가기 보다는 그런 마음을 배워 전보다 더 많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요즘이다.

스폰서라는 의미가 주로 물질적인 측면으로 흘러가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이유의 근저에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이 돌도 돌아 온 세상 곳곳을 찾아 들듯, 도움이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사람을 향한 마음을 그 원동력으로 삼고 흘러 다닌다면 누군가를 스폰하며 또 스폰을 받으며 생기는 힘의 불균형 그리고 거기서 오는 잡음이 사라지지 않을까. 도움의 건강한 순환이 우리 사회에 맑은 피가 되어 흐르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첨부파일
오마이 기고 (스폰서).hwp
덧붙이는 글 '당신은 스폰서가 있습니까?'응모글
#도움 #스폰서 #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자식 '신불자' 만드는 부모들... "집 나올 때 인감과 통장 챙겼다"
  2. 2 '판도라의 상자' 만지작거리는 교육부... 감당 가능한가
  3. 3 [단독]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엮으려는 시도 있었다"
  4. 4 쌍방울이 이재명 위해 돈 보냈다? 다른 정황 나왔다
  5. 5 카톡 안 보는 '요즘 10대 애들'의 소통법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