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꽃

바이올렛 앞에서

등록 2010.05.20 12:00수정 2010.05.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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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을 덜고 덜어 꽃 가꾸고 대를 심으니 이 몸 이대로가 무위로 돌아간다. 시비를 잊고 잊어 향 사르고 차를 달이니 모두 나 몰라라 무아의 경지로다.>


차 한 잔 우려내어 홍자성의 채근담의 한 구절을  옮겨보는 지금은 밤입니다. 바깥에서 달려와 눈 속에 들어왔던 모든 색의 소리들이 어둠속으로 물러나고 홀로 오롯해지는 시간입니다.

일곱가지 색으로 앞뜰 화단의 맨 앞에서 내내 웃는 얼굴로 바람을 부르고 햇살을 부르다가 학교에서, 일터에서 돌어오는 식구들을 반겨준 패랭이 꽃들의 선명하니 고운 모습도 이젠 보이지 않습니다. 주인 없는 대문 앞을 환하게 지켜 주다가 사랑을 담아 주인 있는 창문을 올려다 보아 주는 싱그러운 홑장미의 붉은 꽃잎들도 내일을 위해 쉬고 있습니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도 종일 꽃을 생각하던 날이었습니다.

봉숭아 울타리가 있는 집이란 별명을 얻고 싶어 집 둘레에 촘촘하게 뿌려 둔 봉숭아 씨앗들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올해도 소복하니 올라와 키를 올리고 있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신실해지고 쑥쑥 꽃대를 올리며 정성스레 탑을 쌓고 있는 백일홍의 초록잎 위에 떨어질까 조심조심 반듯한 기도를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눈을 튼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꽃망울을 맺어 놓은 키 작은 황금빛 금잔화에 황금빛 미소로 답할 수 있어 행복하였고 몇 해 동안 가슴 한 켠에 담아두고 칠월이면 달려가 어김없이 그 자리로 돌아오는 치자꽃 향기를 흠모하다가 새봄 앞뜰로 들여온 치자 나무를 누가 볼까 숨겨두고 일찍 피운 그 흰꽃에 온 얼굴을 묻기도 하였습니다.


올해는 어떤 빛깔로 찾아 올까 가지 끝마다 잎 속에 숨어 궁금증을 피워내는 수국의 연두인지 아이보리인지 모를 오밀조밀한 꽃망울들에 잔뜩 귀를 기울였다가 뒤뜰 언덕 위에 한가로이 넉넉함으로 흔들리고 있는 흰 들국화들의 욕심없는 모습에 오물로 가득해지는 마음을 비워내기도 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눈 속으로 가슴 속으로 왁자지껄 하던 뜰안의 꽃들이 모두 잠이 든 이 밤, 나는 또 하나의 꽃과 마주합니다. 그것은 오래 전에 내 눈 앞에서 사라진 바이올렛입니다. 봄을 알리며 피고 진 꽃들은 수선화와 튤립, 그리고 히아신스와 아이리스도 있지만 유독 바이올렛에서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매년 12월에서 1월 그  한겨울에 피어나 추운 나의 창가를 환하게 밝히고 함께 봄을 기다려주던 바이올렛. 따듯한 바람이 불어와 언 땅을 녹여 뜰에 뿌린 씨앗의 눈이 틀 때까지 나와 눈을 맞춰 주고 마음의 은근한 벗이 되어 주던 꽃이기 때문입니다. 

그 꽃이 지고 내내 측은했던 자리를 오늘밤엔 오랫동안 쓰다듬고 있습니다. 두어달 가량 꽃을 피우는 동안 힘을 잔뜩 주고 호위병처럼 겹겹으로 꽃을 고이던 잎들이 축축 늘어져 누운 지 벌써 두 달이 지나갑니다. 마지막 꽃을 보내고 좀처럼 기운을 차려 일어날 줄 모르는 저 아이들을 보니 아무래도 꽃 지고 난 후 몸살을 해도 단단히 하는 듯 싶습니다.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 만났던 꽃을 생각합니다.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인 꽃. 지는 건 잠깐이어도 잊는 건 한참인 꽃. 생각해보면 내 뜰에도 해마다 많은 꽃들이 피고 지지만 지고 나서 이렇게 한참 동안 잊지 못하는 꽃은 없었습니다.

꽃이 피지 않는 계절에 꽃을 피워 오랫동안 잊지 못할 꽃이 된 바이올렛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꽃이 피지 않는 계절에 꽃을 피워 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욕을 덜고 덜어 꽃을 심고 대를 심었으나 잊는 건 한참인 꽃이 되고픈 욕심은 아직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식은 찻잔을 감싸들고 창밖을 봅니다. 오늘 밤, 지고 말 꽃들이 찻잔 속으로 떨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중앙일보 애틀랜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중앙일보 애틀랜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꽃 #바이올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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