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의 영정.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갓 출생한 이윤의 운명이 그저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윤은 출생 이듬해인 숙종 15년(1689)에 원자에 책봉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윤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움직임이 전개된다. 우리 나이로 두 살밖에 안 된 이윤은 바로 이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정쟁의 초점이 된다.
숙종이 이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서인 당파가 들고 일어났다. 서인들은 장 희빈의 아들이 다음 보위의 주인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때 이윤의 세자 책봉에 누구보다 강력하게 반발한 사람은 서인 영수 송시열이었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명성대비가 이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지만, 실제로는 송시열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송시열은 상소를 통해 이윤의 세자책봉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 일은 도리어 그의 운명을 종결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숙종은 그의 상소를 거부했고, 송시열은 같은 해 6월 3일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숙종 16년(1690) 6월 16일 이윤은 드디어 세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장 희빈' 벽 넘지 못한 '이윤 세자책봉 반대' 송시열장 희빈 모자에게 패배의 쓴 잔을 안기려던 송시열은 도리어 자기 자신이 죽음의 독약을 마시고 말았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자 서인의 '영원한 총재'였던 송시열은 그렇게 장 희빈 모자의 벽을 넘지 못하고 고꾸라진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이 장 희빈에게 '잡아먹힌' 이 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 전개를 관찰해보면, 조선 후기 정치투쟁의 흥미로운 먹이사슬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 먹이사슬은 숙종의 할아버지인 효종의 재위기로부터 시작한다.
형인 소현세자가 집권당인 서인의 견제를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에 왕위에 오른 효종(봉림대군)은 취약한 정통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왕권강화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다가 기득권층의 저항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그는 왕권강화를 위해 중앙군 확충을 추진했고 거기에 필요한 재원을 기득권층의 호주머니에서 거두려 했기 때문이다.
이때 효종에게 맞선 기득권층의 대표주자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과 효종은 본래 사제지간이었지만, 이해관계가 걸린 정치적 사안에서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갈등을 풀기 위해 개최된 효종 10년(1659) 3월 11일의 효종-송시열 비밀독대가 결렬됨에 따라 정국의 긴장은 한층 더 첨예하게 고조되었다. 비밀독대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5월 4일에 효종이 41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급서함으로써, 두 사람의 대결은 송시열의 승리로 끝나고 기득권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런데 효종에 대한 송시열의 승리는 그로부터 15년 뒤에 송시열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현종 사망연도이자 숙종 즉위연도인 1674년에 제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이 "송시열이 국왕(효종)을 모독했다"며 그를 귀양지로 내몬 것이다. '주군을 잡아먹은 신하'라는 오명이 송시열에게 덧씌워진 것이다. 이때 송시열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서인의 비호 전략이 주효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비밀독대 때에 송시열은 "병력증강사업을 지지해달라"는 효종의 간청에 대해 "마음공부나 먼저 하라"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효종이 죽고 효종의 정책도 무산되었으니, 적어도 정치적 측면에서는 송시열이 효종을 죽인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효종-송시열-장 희빈' 먹이사슬 다음에 자리한 최 숙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