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몸 담고 있는 곳에서 내는 노동월간 <작은책>입니다.
작은책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누가 쓰라고 하지도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도 않고, 돈도 안 되는 글을 계속 써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글을 쓰세요! 우리가 글을 쓰면 세상이 바뀝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저한테 글을 보내 주시는 분들은 대개 일하면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노동자들이나, '아버지의 나라'인 이 사회에서 숨죽여 지내는 여성들, 한때는 '천하지대본'이었다가 지금은 그냥 '고향 지킴이'가 돼 버린 농민들, '생각'은 하지 말고 '공부'만 할 것을 강요받는 청소년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태어나서 글이라는 것을 처음 쓰는 사람도 있고, 글을 꽤 써 본 사람들도 있고, '글쓰기'가 아닌 '글짓기'만 배워서 안 쓰는 것보다 못한 글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저한테 해 주셨던 말씀 때문일까요? 한 달에 수십 편씩 들어오는 글을 읽으면서도 제가 "이 글은 별로네요"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웬만하면 "좋다, 재밌다, 진솔하다, 감동적이다" 하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선생님이 저한테 해 주신 칭찬이 그랬듯이, 제가 하는 짧은 칭찬 한 마디가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이든 힘이든 가진 것 많은 사람들만 기억하는 이 기울어진 세상에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진짜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글쓰기의 힘을 느끼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직도 글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고, 재주 있는 사람들의 것이고, 잘난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서글픈 것은 아직은 그 말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지도, 재주가 있지도, 잘나지도 않은 사람들의 글을 모아서 책으로 엮는 제 일이 중요한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꿈의 온기만으로 버티기에 서른 살의 세상은 너무 차갑습니다. '이게 다 뭔가. 이런 글 한 편 읽고 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고개를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또 보고 싶어집니다.
고마움 깨닫기까지 15년, 갚아나갈게요이제야 이렇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사실 예전에는 선생님이 보여 주신 에밀레종과 화랑에서의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선생님이 해 주신 칭찬이 얼마나 고마운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제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확인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 고마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러기까지 15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동안 저처럼 선생님 칭찬 덕분에 '글쓰기의 세상'을 만난 후배들이 더 많이 생겼겠지요? 선생님이 조금 섭섭해하실지 모르지만 선생님 못지않게 그 후배들도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게 교단을 지키면서 제게 열어 주신 새로운 세계를 더 많은 후배들에게 열어 주십시오. 저도 선생님처럼 그 세계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더 신명나게 말하고 글쓰며 살아가겠습니다. 그것만이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갚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알고 나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선생님과 제 사이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아, 이 말은 이미 가까이 있는 것 같으니 굳이 직접 찾아뵐 필요는 없겠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더 가까이에서 선생님의 마음을 더 오래 느끼고 지키며 살겠습니다. 여름휴가 때 고향에 내려가면 잊지 않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찾아 뵐 때까지 안녕히계세요. 꼭입니다, 꼭!
- 문예반 스무 명 가운데, 선생님이 유부녀라는 소문에 유일하게 속상해 했던 최규화 올림.
덧붙이는 글 | 고등학교 3학년 때, 잊지 못할 선생님을 한 분 더 만났습니다. 글 잘 쓴다고 나름 까불고 다니면서도 제대로 된 상 하나 받은 적이 없어서 주위에서 놀림만 실컷 받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생각하지도 못한 큰 상을 주시는 바람에 용기를 얻어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 이름이 조'향미' 선생님이랍니다. 참 신기한 인연이죠, 조'미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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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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