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 송유미(필자), 우측 서재필 박사 증손 서동성 변호사(필자의 외척, 오라버니)와 함께, 서재필 박사, 부친 서광효 진사 묘소 앞에서
송유미
나의 할머니 서기석씨가 태어난 곳은 은진(현재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 화석리). 할머니는 청나라의 속화 정책에 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추구하며 일으킨 '갑신정변'에 가담한 오라버니(서재필 박사)가 역적이 되자, 이에 연좌된 부모 형제가 모두 참멸 당해야 했다. 생전 할머니께서는 이에 대해 일체 함구하셨다.
이미 시대가 바뀌었지만 할머니는 '역적'을 입에 담는 것 자체도 두려워하셨다. 나라를 위해 부모 형제를 버린 대의멸친의 핏줄로 인해 하루 아침에 역적이 된 할머니는 구사일생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 땅에 삶의 뿌리를 내리지만, 6·25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할머니는 이남 땅으로 이주한 막내딸을 보러 오셨다가, 38선에 가로막혀 외할아버지와 남겨진 자식들 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할머니의 통일 기도는 곧 당신의 가족을 만나려는 목숨과 같은 의지의 소산이었다. 할머니는 블랙홀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당신의 개인적인 정체성마저 상실했는데 다시 6·25 전쟁으로 고통스러운 이산의 세월로 생을 마감하신 것이다.
할머니의 빨래는 얼룩진 역사의 아픔을 씻어내던 정화의식사위였던 나의 아버지가 끔찍하게 할머니를 위하였으나, 할머니의 얼굴에는 수심의 그늘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 외할머니가 즐겁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하신 유일한 일이 빨래였다. 제법 먼 빨래터까지, 무거운 빨래감을 이고 갔다 오셨다.
그리고 그 빨래를 빨랫줄에 널 때면 항상 환하고 흐뭇한 표정이셨다.
"난... 빨래가 참 좋구나. 빨래하면 근심 걱정이 다 깨끗해지는 것 같아 좋아…."할머니는 그렇게 빨래터에서 만나 웃고 떠드는 이웃들의 위안에 뼛속을 스미는 고독과 쓸쓸함을 얼마간이나마 위로 받으셨던 것이다. 할머니에게 '빨래'는 슬픔이나 아픔, 상처, 그리움과 외로움을 잊고자 하는 성스러운 의식과 다름 없었다.
당시 나는 결핵을 앓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더 이상 내가 살 가망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바람 앞 촛불 같은 손녀 딸의 목숨을 힘들게 살려내셨다. 당시엔 약이 귀했던지라 수세미, 지렁이, 개구리를 달여주고, 병이 씻은 듯 나으라고 댓가지로 가슴이며 다리, 머리를 쓸어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생각하면 나는 할머니 덕분으로 이렇게 오늘까지 살아있는 셈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니, 할머니는 내 곁을 너무 빨리 떠나셨다…. 그러나 할머니가 어린 시절 내게 준 정신적 영향력은 깊었다. 내가 문인이 되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 옛날 길고 긴 겨울밤 동안 끙끙 앓는 손녀의 머리맡에서, 마음 달래며 할머니가 읽으시던 김삿갓 시편의 간접 영향이 컸을 터이니 말이다.
태산도 옮긴다는 기도의 힘으로,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리열 살 안팎 어린 시절 기억의 편린들이 모자이크처럼 맞추어지는 할머니와의 추억들은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생생해진다. 그리고 당시 할머니 백년의 고독과 같은 그 잉여의 세월들이 내 뇌리에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이제 나도 매일 할머니처럼 새벽이면 통일에의 기도를 올린다. 할머니에게서 시작된 그 기도가 이제 나의 소원기도이자, 내 가족의 통일 해원을 위한 기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집은 친가, 외가가 다 북한에 있다. 나의 친할아버지(송종섭옹)는 함경북도 무산군 연사면 사지리 155번지에 아직도 살고 계실까. 그리고 나의 큰 외삼촌(이수동옹)은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동 16번지에 살고 계실까. 한번도 만나지 못한 조부, 조모, 외조부 등 이북에 있는 나의 일가 친척이 정말 보고 싶다.
어디 나의 할머니와 나뿐이랴. 이 땅의 숱한 실향민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나는 오늘도 할머니가 하시듯 맑은 정화수를 올리고 촛불 켜고, 할머니의 통일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기도의 힘은 태산도 옮긴다고. 어쩌면 통일은 삼백예순 날 빠짐없이 기도하던 돌아가신 할머니와 영혼을 모두 쏟아내는 국민들의 진실한 기도의 힘으로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다가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