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과의 유쾌한 취중진담

외할머니의 집뜰이 날 생긴일

등록 2010.05.12 17:02수정 2010.05.1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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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집을 떠나 외할머니가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한 다음날, 새 집에 할머니를 혼자 놔두기 마음 불편해 같이 집을 봐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문 여닫는 법, 가스 밸브 잠그는 법 등. 알려드릴 일도 참 많아서 정신 없는 시간이었지요. 

 

그렇게 분주한 시간이 지나고 오후쯤 되서야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발 좀 뻗을 수 있겠다고 안도하며 방에 누웠는데, 갑자기 할머니께서 절 부르더니 심부름을 하나 시키셨습니다.

 

"진성아. 근처 마트에 가서 술 좀 사다줄래!"

"술이요? 으앗. 할머니도 술 드세요?"

"아, 조금 있다가 친구들이 오기로 했어"

"네? 할머니 친구분들이요?"

 

동네 마트에 가서 술을 하나 사오라는 할머니의 얼굴은 들뜬 표정이셨습니다. 친구들이 집뜰이를 온다는 사실이 표정을 자연스레 밝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할머니 친구란 말에 고개가 갸우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태껏 할머니의 친구분들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술이라니요, 할머니가 전혀 술을 입에 안 대는 줄 알았던 저는 놀라움의 연속인 하루였습니다. 그만큼 무관심했던 것을 방증하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할머니 친구분들이 오면 예의 바른척을 해야하나'라고 내심 걱정을 하며 심부름을 하러 총총 길을 나섰습니다. 할머니들의 주량을 모르기에, 마트에 들러 어림 짐작으로 맥주 패트병과 간단한 안주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아뿔싸, 벌써부터 친구분들이 와 계셨습니다. 저는 괜히 불편한 마음에 인사만 하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친구분 한 분이 웃으며 말을 거셨습니다.

 

"아, 손자인가? 반갑네."

"아.네 안녕하세요."

"손자도 이리와서 같이 술 한잔해!

"네?"

 

할머니들과 같이 술자리라니. 생각만 해도 어려운 분위기일 것 같아 외할머니께 은근한 도움의 눈짓을 보냈습니다. '할머니! 전 그냥. 쉬게 해주세요'라고.

 

하지만 할머니는 "그래, 진성이도 술 한잔 하자"라고, 기대와는 너무 다른 대답을 하셨지요. 결국 저는 그 딱딱한 분위기(?)의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할머니들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습니다. 아주아주 공손하게.

 

"우리 손자, 술 못해. 너무 많이 주지마"

 

할머니의 말에, 괜히 술 처음 먹어보는 시늉(?)까지 해야 했습니다. 저로서는 죽을 맛이었지요.

 

손자는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큰다

 

그런데 거리감이 있을 줄 알았던 할머니들과 대화가 이상하게 잘 맞았습니다. 뭔가 서로의 관심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인 듯 합니다. 자기 걱정을 하는 손자와 손자 걱정을 하는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점이 참 많았습니다. 한 할머니가 운을 띄었습니다.

 

"나이가 몇인가? 나도 자네만한 손자가 있네. 요즘 필리핀에 있는 호텔에 취직해 있지!" 

"정말요? 우와 부럽네요!"

 

처음에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흔한 '엄친아 자랑'인 줄 알고, 살짝 긴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할머니들의 연륜이란 자랑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저 손자의 미래, 사랑에 대한 걱정이 뿐이었습니다.

 

"아니, 문제는 거기서 OO이가 2살 연상 여자를 만나고 만거지. 그런데 그 여성이 여러 어려운 사정이 있는 모양이야. 여러가지 복잡한 사연이 많은 것 같아. 하지만 손자가 사랑하는 게 좋아 보이더라고, 그래서 반대보다는 서로 슬기롭게 이겨내라고 말해줄 생각이네."

 

"우와. 할머니. 정말 멋지시네요."

 

손자의 편에 서서 손자의 사랑을 지지해주는 할머니 친구분의 모습. 저절로 멋있다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역시 우리 할머니의 친구분 다웠습니다.  멋지다는 생각에 취해 있을 즈음에 갑작스런 질문이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애인이 있나?"

"아. 네? 뭐!"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 제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우리 할머니가 한 마디 하십니다.

 

"우리 손자는, 지금 애인 없어. 애가 쑥맥이야. 애 누나도 마찬가지고."

"응? 손자 표정을 보니 왠지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의아한 표정의 우리 할머니가 제게 살짝쿵 귓속말을 건넸습니다. "정말 없니?"는 물음이었습니다. 제가 웃으며 대답했지요.

 

"하하하. 할머니. 왜요? 친구분 손자는 애인있으니까 부러우세요?"

"응. 부러워서 그러지. 정말 없는 거니?"

 

평소 어렵게만 느껴졌던 할머니가, 그리고 할머니의 친구분들이 오늘따라 왜 그렇게 재밌게 편하게 느껴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들과의 유쾌한 취중진담은 그렇게 기분 좋게 끝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할머니를 살짝 안아드리면서 답했습니다.

 

"할머니! 애인 소개시켜 드릴 일 있으면 제일 먼저 할머니께 말씀드릴게요! 기대하세요."

2010.05.12 17:02ⓒ 2010 OhmyNews
#취중진담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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