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인당100여 년 전 상류층의 가옥의 특징을 보이는 학인당.
하주성
학인당은 조선조 말 왕조가 퇴락하자 반가의 상류층에서는 한국 전통 건축기술을 이어받은 도편수와 목공 청해 집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인당은 당시 궁중건축양식을 민간의 가옥에 도입한, 상류층 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집으로 그 가치가 높다. 연인원 4280명이 압록강과 오대산 등지의 우리 목재를 이용하여 2년 8개월 끝에 완공을 했다는 학인당. 당시 돈으로 백미 4000석(8000가마)을 들여 지었다는 학인당의 규모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효자 백낙중은 효자로 소문이 나 고종황제는 특별히 그의 효행을 높이 사 '승훈랑'이란 벼슬을 내려주었다. 백낙중은 이 집을 장남 백남혁이 태어남을 기념하여 1905년에 부친 백진수에게서 물려 받은 대지에 지은 것이다. '학인당'이란 명칭은 백낙중이 서거 후 그의 호인 '인재(忍齎)'에서 '인'자를 따서 지은 명칭이다.
6·25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는 안채와 행랑채를 매각. 했다. 1970년대에는 용인민속촌에 이 집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거액을 제시하며 두 차례나 팔기를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몇 번의 권유가 있었으나 백남혁 부친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힘을 썼다고 한다.
전북 예술의 산실 학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