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특별한 이삿날 풍경

60년만의 외할머니 이삿날

등록 2010.05.09 11:31수정 2010.05.10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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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마지막 날. 이날은 외할머니에게 있어 아주 아주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결혼 후, 무려 60년 세월 동안 살던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특별한 날, 저는 집에서 공부하는 취업 준비생(?)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촌들을 대표해서 할머니 댁으로 와야 했지요. 삼촌, 삼촌 친구분과 함께 할머니의 이삿짐을 나르는 일꾼으로 선정된 것이지요. 
 
 60년만의 할머니의 이사. 할머니가 어떤 기분일지 감이 안잡힌다.
60년만의 할머니의 이사. 할머니가 어떤 기분일지 감이 안잡힌다.곽진성
60년만의 할머니의 이사. 할머니가 어떤 기분일지 감이 안잡힌다. ⓒ 곽진성
속으론 '그냥 편하게 이삿짐 센터를 쓰지' 라고 툴툴 거렸지만, "짐, 얼마 안 되니까 우리끼리 일해서 끝내자!"라는 삼촌의 말에 싫어요, 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카의 자존심 이라는 게 걸려 있으니까요. 그래서 "삼촌, 그 까짓것 대충 날라버려서 빨리 끝내요"라고 자신감 있게 말해버렸죠. 결국 30일 아침, 이런 이유로 저는 이른 시간부터 외할머니 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외갓집에 도착했는데 삼촌과 친구분, 그리고 할머니 이웃 분들은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까막득한 짐을 보니 눈 앞이 아찔합니다.
 
 쌓여있는 이삿짐, 언제 옮긴담.
쌓여있는 이삿짐, 언제 옮긴담.곽진성
쌓여있는 이삿짐, 언제 옮긴담. ⓒ 곽진성
"어서 와라! 나를 짐 많으니까 어서어서 서둘러."
"으악. 짐 많네요, 삼촌."
"그래, 열심히 해야 해!"
"흑. 네."
 

장농, 텔레비전, 냉장고 등등. 온갖 무거운 물건을 보니 괜히 한숨이 나옵니다. 이걸 언제 다 옮기나 하는 생각이 머릿 속을 스칩니다.

 

'휴, 지금이라도..... 이삿짐센터 부르자고 해야하나?'

 

그래도 다행히 세 사람이 할 줄 알았던 이삿짐 나르기를 많은 이웃들이 도와줘서 빨리 끝낼 수 있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헌신적인 일손 돕기 덕분에 그 많던 짐들이 순식간에 트럭에 옮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짐은 단번에 사라졌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못한 모양입니다. 할머니의 이사 소식에 이웃분들의 표정에선 아쉬움이 역력히 묻어납니다. 오랫동안 함께 한 이웃 사촌을 떠나보내기에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함께 하는 모습입니다. 작별 인사를 하는 말 속에 그 감정이 고스란히 섞여 나옵니다.

 

"아이구, 아쉬워서 어떡해요. 잘 사세요."

"그래요. 고마웠어요."

 

할머니 역시 한평생 살았던 집을 떠나는 것이 섭섭하신 것 같습니다.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좋다고 웃으시지만, 오랫동안 가꾼 꽃과 나무가 있는, 장장 60년간의 추억이 서려있는 집을 떠나는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을까요? 그 시간의 무게가 저는 감히 상상이 안 됩니다.

 

 이웃분들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할머니
이웃분들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할머니곽진성
이웃분들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할머니 ⓒ 곽진성

그럼에도 집을 옮기는 것,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할아버지 때문이지요.

 

지금 사는 곳에서는 할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할머니가 방문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가까운 이사를 해 할머니가 좀 더 편하게 요양원을 방문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물론 추억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과거가 될 집을 몇 번이고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제 마음을 아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에겐 아련한 추억보단,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자주 만나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겠지요. 현재가 60년의 추억보다 더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런 생각이 드니, 이삿짐 들기 귀찮다고 툴툴거리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서려 있던 마당, 그리고 외가에 도착하면 내 안방처럼 누워 있던 평상, 내 마음을 즐겁게 했던 마당의 꽃들. 제게도 소중한 추억이었을 옛 외가집에 작별 인사를 하게 됩니다.

 

추억이 담긴 외갓집. 작별이 아쉽지만 이제 또 누군가의 새로운 추억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야겠지요.

2010.05.09 11:31ⓒ 2010 OhmyNews
#할머니 #이삿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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