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온 지 10년, 이제 밥은 안 굶어"

2년 만에 캐나다에서 걸려 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등록 2010.04.30 11:55수정 2010.04.3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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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서 그만 나 일찍 잔다고, 아직 자고 있지 않은 아이들이랑 남편에게 나, 먼저 잔다. 깨우지 마. 그러고서 들어가 누웠는데 어느새 그만 잠이 들었던가 보다. 남편이 자고 있는 내 어깨를 흔들며 '전화 받아' 그런다.


"에이, 자는 사람 왜 깨워, 지금 잔다고 그러지."

잠결에 그리 말이 튀어 나와 버렸다.

"아니, 받아야 할 전화야. 당신 친구거든." 잠이 묻어 있는 목소리로 수화기에 대고, "여보세요?" 하니까 "나야" 그런다.

"응? 어. 누구? 아…."

남편의 말대로 친구다. 내가 언제라도 내 친구라고 말 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잤어?"
"응."
"그래 여긴 이른 아침인데 거긴 이제 자야 할 시간이지."
"아니, 안 자도 괜찮아."

그렇다, 이 친구의 전화라면 하룻밤쯤 안 자도 뭐 상관없다. 아니 안 자고 싶다. 내겐 하나밖에 없던 이 친구가 먼 길을 떠나버린 지 올해로 십년 째다. 1997년 늦가을, 지금은 슬슬 아련한 단어가 되어 버린 아이엠에프, 외환경제 위기가 온 나라를 뒤죽박죽 만들어 버린 후 많은 사람들이 추락 아닌 추락을 했었다.


아침이면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남편이 졸지에 일터를 잃고 집에 들어앉게 되자 생활이 어렵게 된 이 친구는 처음엔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과외를 다니고 전단지를 돌리고 세탁소에 가서 잔심부름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을 살아보겠다고 갖은 애를 쓰던 이 친구는 이 나라에선 도저히 희망이 안 보인다고 캐나다로 투자 이민을 떠나버렸다. 느닷없이 떠나버린 친구 때문에 십 년 전의 그 봄은 참 많이도 막막했었다.

어딘가 차를 타고 가다가도 하얗게 핀 망초 꽃을 보면 그냥 눈물이 나 버리곤 했었다. 그곳에도 망초 꽃이 피었을까? 달맞이꽃은? 코스모스는? 그랬었다. 이민을 떠난 후로 이 친구는 사흘에 한 번쯤 전화를 했다. 그러다가 한 달, 그리고 두 달 그러면서 일 년에 한번. 날이 갈수록 전화하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그 친구는 수화기에 대고 어느 땐 울기도 하고 어느 날인가 엔 여기서는 구할 수 없는 약을
구해서 보내주기도 했었다. 그러고선 어느 날인가 뚝, 전화가 끊어졌다. 답답해진 내 쪽에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사를 한 건가? 그리 생각 했었다.

그랬는데 어젯밤  거의 2년 만에 그 친구가 전화를 해 왔다.

"어떻게 지내? "그렇게 묻는 내게
"이제는 밥은 안 굶어."
"밥을 안 굶어?"
"처음에 나 여기 와서 남의 집에 설거지하러 다닐 때는 늘 점심을 굶었었어. 여기선 일하는 사람한테 밥까지는 안 주거든. 그래서 난 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꼭 밥은 챙겨서 먹여.
종일 일만하고 밥도 굶고 저녁에 돌아오면 그대로 쓰러져 자 버리기도 했었거든."

그랬구나, 그 먼 곳에서 넌 밥도 굶어야 했었구나. 혼자서 끄덕거리는데 울컥 목이 아프다.

"나, 하두 한국말을 안 해서 하고 싶거든, 그러니까 나 말 많이 해도 그런가, 부다해라, 알았지?"
"그래, 많이 해, 다 들어 줄게."

두 시간쯤을 그 친구는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있다. 그러다가 여긴 날씨가 너무 변덕스럽다는 말이 이어지다가, 요즘 거긴 비가 너무 많이 온다며? 물었다가, 여기도 봄인데 날씨가 춥다는 내 말에 문득 말이 끊어지더니 한숨을 푹 쉰다.

"나 처음 여기왔을 땐 비오는 날이 참 좋았었어. 어찌나 폭폭 한지 막 원 없이 울고 싶은데 울 데가 있어야지. 그럴 때 마침 비가 왔는데 큰 우산을 쓰고 거리로 나갔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막 걸으면서 그냥 엉엉 소리 내서 울었어. 우산이 가려주니까 들키지도 않고 빗소리에 우는 소리도 안 들리고 그러니까 참 좋더라고. 어쩌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건지 비 올 때마다 나가서 울었어. 그런데 요즘은 그럭저럭 울 일도 별로 없는데 여기저기서 비가 너무 많이 온다 그러구."

그러면서 굉장히 큰소리로 웃는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친구 웃음소리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그 녀석 살아가는 모습은 예전의 그 성깔 그대로다. 역시 사람은 못 변하는가 보다.

"김치도 왜 여긴 한국에서 먹던 그 맛이 안 나는지 몰라. 조선오이도 먹고 싶고."
또 빼놓지 않고 김치 타령이다. 이 친구는 유난히 김치를 좋아했었다.
"거긴 조선 오이가 없어?"
"있는데 비싸서."

그러고는 또 히히 웃는다. 그래, 어쩐지 이제는 이 친구 제법 편안해 보인다. 그나마 다행이다. 동생이 아직도 그런 구닥다리를 쓰고 있느냐고 구박하던 뻐꾸기시계가 열한 번을 울고 열두 번을 울고 또 새벽 한시라고 딱 한번 벗~국 하고 들어 갈쯤에 그 친구 그런다.

"나 빨리 늙고 싶어."

느닷없이 그러고선 푹 한숨이다. 갑자기 수화기를 잡고 있던 내손에서 맥이 쭉 빠진다. 나는 안다. 저 친구의 빨리 늙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할머니들처럼 얼굴이 쭈글쭈글 늙어 힘없어지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얼른 생활의 짐을 벗어 버릴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그래,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저리도 간절하게 늙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냐, 마음이 느닷없이 처연해져 나도 아무 말을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너 자야지" 그런다.
"그래. 너도 아침 먹어야지." 그렇게 대꾸를 하다가 "너만 그런 거 아니고 나도 그냥 얼렁 나이 들어서 늙고 싶어" 그랬다. 그래, 정말 그러고 싶다. 그렇게 그런 말들이나 하다가 전화를 끊었는데 잠이 안 온다, 이제.

어느새 식구들은  다들 잠자리에 들어갔는지 방마다 불은 꺼져 있는데 잠을 못 자겠는 나는 거실을 오락가락 몇 바퀴를 돌고 돈 것일까. 허리가 아파서 그만 들어 와 자리에 누웠는데 얼결에 잠이 들었나 보다.

주사야몽이라고 꿈 속에 그 녀석이 내 집을 찾아왔다. 마당 앞에 장독 항아리가 오십 개쯤 나란 나란 줄지어 앉아 있는 저의 집 사진 두 장을 들고서. 무슨 꿈이었을까. 그 많은 장독 항아리의 의미는 또 뭐란 말인지.
#친구 #이민 #경제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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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주부이자 직장인 입니다. 주변의 이야기나 일하면서 느끼는 일들을 써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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