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태평로 삼성빌딩(자료사진)
유성호
솔직히 지금 필자의 속은 무척 쓰리다. 지난 10여년간 경제관련 시민운동에 관여한 필자로서는 생명보험회사(이하 생보사) 상장 문제만큼 철저한 실패를 맛본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삼성생명이 있다.
지금도 필자는 2007년 1월 제3차 생보사 상장자문위원회(위원장 나동민 박사, 현 NH보험 대표, 이하 상장자문위)가 내린 결론에 대해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즉 "생보사는 완전한 주식회사이며, 배당 문제 등에서 보험계약자의 권익을 침해한 바도 없고, 따라서 상장에 따른 자본이득은 모두 주주 몫이다"라는 결론에 대해 한마디도 동의할 수 없다. 당시 나동민 위원장은 상장자문위의 보고서야말로 노벨 경제학상 감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그 보고서에 내재된 이론적⋅실증적 오류에 대해서는 그 누구와도 토론에 응할 용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필자는 삼성생명의 상장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비록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결론이 내려진 일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필자가 비록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식의 혁명가도 아니다.
상장자문위의 결론에 따라 2007년 4월 당시 증권선물거래소가 '유가증권시장 상장규정' 개정안을 의결했고, 곧이어 당시 금감위가 이를 승인했다. 이를 기초로 이미 동양생명과 대한생명이 상장했고, 삼성생명도 상장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마디로, 시장은 생보사 상장을 전제로 이미 많이 움직였다. 현 상황에서 생보사 상장, 특히 삼성생명 상장을 저지하는 것(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가능성도 희박하지만)은 시장의 안정성을 깨는 일이다. 내 주장이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불특정 다수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 수는 없다. 더구나 소액주주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래서 속은 쓰리지만, 코멘트하지 않았다.
상장은 경영판단의 문제, 그러나...
그런데 최근 삼성생명의 상장(IPO; Initial Public Offering)이 가시화되면서 재미있는 논란거리가 생겼다. 비상장 회사가 상장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신주를 발행하여 성장을 위한 새로운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주주가 구주 매각을 통해 기업가치 성장의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삼성생명은 총 4443만 7420주를 공모하는데, 이게 모두 삼성차 채권단과 신세계⋅CJ 등 삼성으로부터 계열분리된 친족그룹이 보유한 물량이다. 즉 삼성생명이 새로 주식을 발행하지도 않았고, 이건희 회장 등의 지배주주가 기존 주식을 팔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이상한 상장을 도대체 왜 하느냐'라는 논란이 생긴 거다. 이것이 오늘 이 글의 주제다.
물론 상장을 하느냐 마느냐,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 등은 순전히 경영판단 상의 문제다. 즉 불법이 아닌 한 제3자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다만 상장 이후에는 불특정 다수의 외부 소액주주가 생겨나고, 이들 사이에 끊임없이 주식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장회사는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책임성 제고를 위한 보다 엄격한 제한이 따른다. 바로 그 지배구조의 관점에서 이번 삼성생명의 이상한 상장에 대해 살펴본다.
신주를 발행하지 않은 이유우선, 삼성생명은 왜 신주를 발행하지 않았나? 더구나 작년 11월 삼성생명이 처음 상장 계획을 발표할 때 '2015년 글로벌 톱 15위권 진입을 위한 자본확충의 필요성'을 그 명분으로 내세웠던 점을 감안하면, 논란거리가 될 소지가 분명 있다.
그러나, 신주 발행은 비용이 많이 드는 자금조달 방식이기 때문에, 상황이 변했다면 굳이 신주를 발행할 필요는 없다. 2009년 12월 말 현재 삼성생명의 지급여력비율(보험사의 자본적정성을 측정하는 지표로서, 은행의 BIS비율에 해당한다)은 309.8%인데, 이는 경쟁사인 대한생명의 228.1%, 교보생명의 243.3%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따라서 국내시장에서의 경쟁만을 생각한다면 신주 발행의 필요성은 없다.
반면, 현재 세계 30위권인 삼성생명이 15위권으로 도약하기 위해 외국 생보사를 인수하는 등의 글로벌 전략을 고려한다면 자본확충이 필요하겠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불확실성이 채 가시지 않은 현 상황에서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중한 판단일 것이다.
따라서 작년 11월에 글로벌 톱 15위권 진입 운운한 것은, '삼성생명 상장이 향후 그룹의 지배구조와 승계구도에 어떤 영향은 미칠 것인가'라는 식으로 일파만파 번져나가는 세간의 관심을 비켜가기 위한 홍보팀의 애교 정도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이건희 회장이 구주를 팔지 않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