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중 신영옥 루치아가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 장면
문성식
이제 신영옥의 본격적인 무대 훔치기 작업이 시작됩니다. 흔히 극 속에서 배우가 너무 연기를 잘 할 때, 드라마보다 배우가 눈에 들어올 때, 영어로는 'Steal the Show'란 표현을 쓰죠, 그만큼 무대 자체를 흔들고 강탈했다는 뜻일 겁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신영옥의 벨칸도 창법으로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는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극의 실제 풍경과는 '저 만치' 떨어져 있습니다. 목소리의 절대적 아름다움과 실제 현상의 거리감. 바로 루치아의 비극성이 탄생하는 이유지요.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솔직히 신영옥을 매체를 통해서만 봤지, 오페라를 통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녀가 가진 명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실하게 배웁니다.
절제된 목소리, 무대의 대기를 메우는 사랑의 절규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선율과 떨림을 통해, 미세한 감정의 파장과 균열을 일으킵니다.
마치 나비의 작은 날갯짓처럼 말이죠. 날갯짓으로 인해 후방에 있는 우리 모두에겐 큰 파도가 일듯, 그녀의 아리아는 광기의 시대, 폭력과 전쟁으로 점절된 영국 사회에서, 사랑의 자기결정권을 지키려는 여인의 단아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루치아의 죽음이 신영옥의 음성으로 아름다운 '비극'이 됩니다.
그녀의 아리아는 광기의 시대를 고발하는 '모든 것을 빼앗긴'자들의 절규입니다. 오페라를 볼 때마다 저는 항상 한국의 가수들이 노래의 수준은 높지만, 왠지 양식화된 연기를 보여주는 면모로 인해, 거부감이 들었답니다. 오페라를 전공하는 친구들을 만나보면, 스타니슬랍스키(러시아의 연출가이자 배우)도 공부하고, 감정의 기억이나 배우의 행동수준에 대해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정작 공연 무대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이상하리 만치 '쪼'가 있는 연기가 대부분이었지요. 기계적인 연기란 뜻입니다. 혼이 담기지 않은 행동이란 말이지요.
물론 오페라는 목소리로 하는 연기라고 한다지만, 극이란 형태는 목소리와 더불어 행동의 일치가 이뤄질 때 관객의 교감을 이뤄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오페라는 이 부분의 취약점을 매번 드러냈죠. 그러나 신영옥은 다릅니다. 그녀의 연기는 철저하게 캐릭터를 몸으로 해석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강력합니다. 그러나 절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