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건설업체 대표가 수십명의 검사들에게 금품, 향응을 접대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설치된 조형물 '진실의 눈'에 비친 청사 전경.
유성호
"검사 스폰은 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6살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N건설)을 물려받았다.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N건설 대표이사가 된 것이다.
나는 별도로 N프라자를 설립하기도 했다. N프라자는 총 6층 건물로 지하 1층에는 룸살롱이 있었고, 1·2층에 커피숍과 사우나 등이 있었다. 그리고 3·4층에는 숙박시설이 있었는데 호텔만큼 좋았다. 원래 룸살롱은 1년 정도 직영하다가 임대해줬고, 모텔은 우리가 직접 경영했다. 접대를 위해 룸살롱이나 모텔을 경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도 술과 성 접대가 이루어졌다.
아버지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을 때 나이가 어렸다. 그때 경남지역에 건설사가 30개 정도 있었지만 종합건설사는 없었다. 나머지 경쟁 건설사의 사장들은 대부분 아버지뻘 나이였다. 당시 우리 회사는 관급공사만 했는데, 서부경남에서 제일 컸다. 91년엔가 매출이 430억 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4000억 원이 넘는 규모다. 지금은 진주세무서 사천지소로 바뀌었는데 당시에는 삼천포세무서가 있었다. 우리가 세금을 안 내면 세무서 운영이 안될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일일 명예세무서장을 하기도 했다.
나는 민자당 소속의 경남 도의원을 했다. 도의원이 된 이후에는 관급공사 계약을 내 이름으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건설업을 하던 동생에게 양도하고, 나는 N프라자만 운영했다. 당시 토지 등 기본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정치쪽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아랫사람의 꾀임에 빠져 사고를 쳤다. 나는 당연히 회사를 동생에게 양도했으니까 당좌수표나 어음의 발행자도 바뀌었을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명의로 발행돼 형사처벌을 받은 적이 있다.
"검사들이 으레 '스폰'을 요구하니까 안 해줄 수 없었다"나는 85년께 법무부와 검찰에서 위촉하는 소년선도위원과 갱생보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런 활동을 하려면 돈이 들기 때문에 지역유지를 위원으로 위촉한 것이다. 내가 제일 젊으니까 부회장이 되어서 제일 많이 활동했다. 그런 활동으로 인해 검찰청 출입이 잦았다.
보통 검찰의 사무과장이 검사들을 소개했다. 사무과장이 검사를 중개하면 내 명함을 주고 검사들과 이름을 텄다. 지청장은 나이가 많았지만 검사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가 있어서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검사 스폰은 체육대회, 등반대회 등 행사비용을 대는 데서 출발했다.
갱생보호위원 등을 맡다 보니까 휴가 때든 행사 때든, 자기 손님이 놀러올 때 '스폰해 달라'고 전화가 온다. 검사들이 '한잔 하고 싶다'고 하면 함께 회식을 하고 2차를 갔다. 당시 성접대는 필수적이었다. 물론 끝까지 성접대를 거부한 검사도 일부 있었다. 극히 일부만 빼고 성접대를 안 받은 검사들은 거의 없었다.
남들은 '권력기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접대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물론 100%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어렸다. 20대가 건설업를 하는 경우는 당시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맏아들로서 책임감도 있었다. 검찰에 '보험금'을 든다는 생각도 했고, 나로서는 '뒷배경'도 필요했다. 또 검사들이 으레 '스폰'을 요구하니까 안 해줄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친 지출이었다.
'촌지' 주는 일은 월례행사였다. 수표는 절대 안 주고 현금으로만 줬다. 그것도 반드시 신권으로 바꾸어서 줬다. 지청장에게는 1회 100만 원, 검사들에게는 1회 30만 원을 줬다. 한달에 두 번 줬으니까 지청장은 한달에 200만 원, 검사들은 60만 원을 받아간 셈이다. 검사들을 중개한 사무과장에게도 30만 원을 줬다.
검사실에 가면 계장들이 있는데 지금은 약해졌지만 당시 이들의 '끗발'이 셌다. 그들은 그 지역의 토착세력이었기 때문에 초임검사들은 이들의 눈치를 많이 봤다. 그들한테도 10만 원이나 20만 원을 줬다. 일반 여직원이나 전화교환원에게도 회식은 물론이고 돈도 줬다.
촌지를 주러 가기 전에 경리를 시켜 신권으로 바꾸어 놓았다. 경리가 신권을 가져오면 부속실의 비서실장 등이 100만 원짜리, 30만 원짜리, 10만 원짜리 '봉투'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행비서를 데리고 검찰로 갔다. 나중에는 BMW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벤츠를 타고 검찰을 드나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검사실은 열악했다. 하지만 평검사라고 하더라도 방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많이 오픈(open)돼 있지만 당시에는 검사실이 폐쇄돼 있었다. 돈을 내놓으면 당연스럽게 받았다. 돈을 안 좋아하는 검사는 없었다. 돈을 주면 "또 주시나?" "오늘 회식하면 돈 써야 하는데 이렇게 돈을 주면 우짜나?" 등의 반응을 보였다. 회식할 때는 회식비 외에 교통비조로 20~30만 원을 건네곤 했다.
처음에 안 받으려고 하는 검사들도 있었다. 아마도 P대 로스쿨 교수로 가 있는 K검사, 법무부 고위간부인 H검사 등 두 세 명 정도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도 나중에는 다 받았다. 진주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B검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말문을 트고 나서는 내가 운영하는 사우나를 제일 많이 이용했고 그뒤로는 촌지를 받았다.
"○○지검 부장검사 전원을 수 차례 접대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