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 전남 고흥 마복산 정상 부근에서 만난 철모르는 진달래
송성영
고흥 새 터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큰 도로를 접어두고 마복산 산림도로를 탔습니다. 12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철모르는 진달래가 피어있는 마복산 능선을 올라타자 산과 바다가 어우려진 절경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곳뿐만아니라 바다를 끼고 있는 고흥 곳곳이 절경입니다. 거친 입심과는 달리 후덕한 사글세방 주인 할머니는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끼니부터 챙겼습니다.
"밥은 먹었소?""지금이 몇 신디 아적도 안 먹었겠슈.""하두 소식이 없길래 지랄하고 안 오는 줄 알었소이.""집 짓는 사람이 일이 있어서 늦었슈."사글세방을 소개받을 무렵 처음 만난 이후 두번째 만남이었는데 할머니의 속없는 거친 입심 덕분에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 큰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살겠다고 지어 논 방인디요이. 지랄하고 살지도 않고..." "지금 어디 있는디요.""순천에서 버스운전 안하요... 그나저나 여기까지 와서 뭣해 먹고 살려구 그러요.""바다 일해서 먹고 농사 져서 먹고 또 글 써서 먹고 살지요.""우리 할아버지도 글씨를 썼는디 천하고 천한 게 글 쓰는 일이라니께, 바다에 나가믄 먹을 것이 생기고 돈이 생기는 디, 글씨 쓰는 일은 돈도 밥도 생기지 않소. 그런 일을 지랄하고 뭐라 허요."일찍이 세상 떠난 할아버지는 한문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한문 글씨를 써가며 동네 사람들에게 필요한 서류를 작성해주고 농사일이나 바다 일은 건성건성 했다 합니다. 땅마지기 처분해 가며 팔자 좋은 세상 살다갔다 합니다.
"나하구 나이차가 너무 나서 일찍 가부렸지만 그려도 영감 없응께 허전허요.""우리 아버지도 환갑 지나서 돌아가셨는디.""각시는 몇 살여?""저하고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디요.""몇 살 차이 안 나는 구만.""제가 수염이 허여서 많이 나는 줄 알았쥬?""나처럼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믄 말년이 쓸쓸 안허요......" 홀로 생활하는 할머니는 끊임없이 한탄을 쏟아냅니다. 만만한 상대를 만나면 살아온 세월을 밑도 끝도 없이 쏟아내는 것은 나하고 꼭 닮았습니다.
밖에는 바다 바람이 휑하니 불어옵니다. 할머니의 앞니는 세월에 견디지 못해 휑하니 죄 빠져 나갔습니다. 나는 나이 오십에 앞니 몇 개를 틀니로 감쪽 같이 바꿔 놓았지만 팔순을 넘긴 할머니의 앞니는 그냥 비워져 있습니다. 할머니와 살아온 나날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해졌습니다.
"저녁 먹어야제? 나가 금방 채려 올테니께 그대로 있소이.""아뉴, 할머니 말씀은 고마운디 마누라가 도시락 싸 줬슈. 안 먹으면 상해요."아내가 싸준 보온 도시락을 챙겨 야밤에 새 터로 나섰습니다. 보온 도시락은 적어도 세 끼를 때울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터를 구하러 나설 때마다 늘 도시락을 지참하고 다니며 궁상맞게도 바닷가에서 산속 깊은 곳에서도 홀로 도시락을 까먹곤 했었습니다.
밥숟가락을 입안으로 넣기 전에 몇 숟가락을 고시래 해가며 내일 굴삭기 작업으로 천지가 진동하게 될 것을 터에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들에게 또다시 죄를 고했습니다. 덧붙여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빌었습니다.
꾸역꾸역 배를 채우고 나서 밤바다로 나섰습니다. 밤하늘은 별빛 가득 총총했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점퍼 깃을 올려 담배를 꺼내 물다가 문득 학생 시절 매년 찾아 가곤 했던 민박집 섬 소년이 떠올랐습니다. 벌써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민박집 손님이 찾아오면 장대를 메고 앞장서 갯바위 낚시터로 안내하던 그 소년은 30대 중반을 넘겼을 것입니다.
내게 물었습니다. 삽시도 민박집 소년처럼 세상일에 지친 사람들이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안내자가 될 수 있을까? 영화 속의 주인공 옆으로 낚싯대에 망태기 메고 있는 듯 없는 듯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 행인처럼 살 수 있을까?
내게 바다는 안식처이자 도피처였습니다. 반복되는 현실이 지겨울 때 마다 훌쩍 떠난 곳도 바다였고 학창 시절 총학생회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자 명단에 올라 도망치듯 떠난 곳도 바다였습니다. 친구들이 지하실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 말입니다.
20여 년이 흘러 또 다른 바다 앞에 서 있었습니다. 겨울 바다바람이 거세게 얼굴을 후려칩니다. 더 이상 달아날 곳도 없습니다. 바다는 이제 평생을 살아야 할 운명처인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안식처나 도피처가 아니라 생활 그 자체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거센 바람을 피하지 않고 그렇게 오랫동안 바다와 마주 서 있었습니다.
다음 날, 오후 윤구씨는 서울에서 도시설계사 일 그만두고 이제 마악 목조주택 일을 시작했다는 이성훈씨와 함께 새 터로 찾아왔습니다. 30대 후반의 성훈씨는 이제 19개월 된 딸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성훈씨와 세상사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글세방 함석지붕이 우다닥 우다닥 큰 소리를 냅니다. 우박이라도 떨어진 줄 알고 밖에 나가 보니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비 때문에 공사에 차질이 생길까 싶어 걱정이 앞서는데 윤구씨는 태평하게 누워서 계산기를 두드려 가며 부지런히 건축자재의 품목을 뽑아내고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를 위해 면소재지로 나설 무렵 다행히 비는 그쳤고 때맞춰 대전에서 내려온 김종수씨가 합류했습니다. 성품이 시원시원한 종수씨는 낚싯대까지 챙겨왔습니다. 횟감을 담당하고 있다는 그는 집 짓는 틈틈이 바다낚시를 할 모양입니다.
새터에서 가장 가까운 면 소재지의 밥집들을 끼웃거리며 집 짓는 기간 동안 신세 질 만한 곳을 물색했는데 아침 7시에 문을 여는 식당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큰일 났네, 고흥 읍내는 너무 멀고, 아침 식사를 어떻게 하쥬?""걱정 마세요. 식당이 많은데 아침 식사할 만한 곳이 없겠어요?"한 식당을 점찍어 놓고 정을 붙이다 보면 아침밥을 해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전국각지를 떠돌며 집을 짓고 있다 보니 그만큼 세상 물정에 밝은 윤구씨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을 찾아 면 소재지로 떠났고 나는 한 끼 분량이 남아 있는 보온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낫을 들고 연못 주변의 잡목들을 정리하다가 다 낡은 모터 펌프를 발견했습니다.
정확히 8시에 맞춰 도착한 굴착기를 이용해 농업용 관정이 묻혀 있을 만한 자리를 찾아내 모터 펌프와 연결했더니 물이 꽐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앞집 박 선생은 관정을 파는 데 80만원을 들였다고 하는데 모터와 관정까지 합치면 백만 원 이상을 절감한 것입니다. 하지만 농업용 관정이기에 식수로 가능한지가 미지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