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호 씨. (지난 2008년 <상록수> 집필지인 충남 당진 필경사에 있는 부친의 묘소 앞에서)
심규상
근대 문학계 작가들이 남긴 친필원고가 거의 없는데도 이례적으로 심훈 선생의 육필원고가 1000매가 넘게 남아 있는 데는 그만한 연유가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50여년 동안 심훈 선생의 유품을 모아 간직해온 선생의 3남인 심재호씨(75)의 역할이다.
그는 1936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지만 같은 해 아버지 심훈은 세상을 떴다.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1974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미주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미주동포신문인 <일간뉴욕>을 창간하고 13년 동안 편집국장 겸 발행인을 역임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부친의 지인과 유품을 찾아 삼천리 방방곡곡을 오갔다. 북한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1988년 '뉴욕이산가족찾기' 후원회를 조직해 1995년까지 북한을 19차례를 방문, 1000여 명이 넘는 남북 해외이산가족을 찾아주는 성과를 올렸다. 북쪽에 거주하는 부친의 지인들도 만나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산가족들을 찾아 주느라 미국에서 피나게 벌어서 장만한 내 집 한 채를 날렸다"며 "그러나 문서 없는 수많은 집들을 미국과 내 조국 남쪽과 북쪽에 장만했다"며 흡족해 했다.
그는 "아버님은 <상록수>를 통해 일제에 수탈 당하는 농촌과 농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제에 저항하고 자립자조하면서 자주교육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며 "하지만 지금 살아 계신다면 농촌 소설보다는 남북통일과 민족화합 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근 큰 수술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고향 당진에서 부친의 작품과 발자취를 정리, 연구하는 일을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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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심훈 선생 유품, 고국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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