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추노>는 감히 <모래시계> 이후 최고의 드라마라고 생각해본다. 나는 이 드라마를 '민중사를 넘어선 민중사'라고 부른다. <추노>는 스스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며 또 답하고 있다.
첫째, 노비는 인간인가. <추노>는 역사적 관심에서 왕따 당해온 노비의 세계에 시선을 돌린다. 궁궐과 왕의 이야기, 권력자의 정치게임으로부터 이 땅 다수 민초의 세계로 눈을 돌린 것이다. 그것으로도 훌륭하지만 <추노>가 더 뛰어난 이유는 노비에 대해 묻고 또 물어 노비를 전형적 집단이 아닌 주체적 개인으로 발견해냈기 대문이다.
양반 중심의 사극에서 노비는 그저 무지랭이 종복이었고 민중사적 관점을 가진 극 속에서도 사회경제적 집단 내지는 민란의 '떼거지' 군중이었다. 그러나 <추노>는 노비에 대한 기존의 상을 깨고 노비를 생각하고 갈등하고 사랑하는 복잡다단한 개인이자 관계로 바라본다.
극 초반에 다소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들었던 다양한 캐릭터들은 다 이유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노비였던 초복이, 노비가 아니었다가 노비로 떨어진 업복이나 송태하, 노비였다가 그 신분을 탈출한 언년이, 노비보다 나을 것 없는 주제에 악착같이 노비를 쫓는 대길과 천지호 패거리, 노비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반짝이 부모, 노비를 거부하고 해방을 꿈꾸는 개놈이와 노비당. 이런 다양한 시선을 통해 노비는 실체를 가진 인간이 되었다. 극적 긴장감도 높아졌다.
둘째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어떻게 만나는가. 추노꾼과 도망노비의 갈등은 <추노>의 1차적 재미다. 대길과 송태하는 서로 죽자고 싸운다. 궁중의 암투가 아니라 복근을 꿈틀거리며 붙는 살전이라 보기에도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그들의 싸움엔 아무런 정치적 이유도 뿌리 깊은 원한도 없다. 사회의 악폐가 낳은 대리전일 뿐이다. 대길은 양반이었지만 저자의 싸움꾼으로 몰락했고 태하는 무사였지만 지금은 도망노비다. 그들은 닮았으면서도 싸워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으므로.
이런 싸움은 역사 속에 비극적으로 반복됐다. 동학 농민군은 역시 농민의 자식인 관군과 싸워야했고, 지리산 빨치산은 역시 가난한 집안의 아들인 토벌대랑 죽고 죽여야 했다. 오늘날은 다른가. 대길은 용역깡패고 노비는 철거민이다. 원인 제공자는 따로 있는데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치고 박는 건 못 먹고 못 사는 두 집단이다.
그런데 대길과 송태하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을 멈춘다. 그리고 같이 뛰기 시작한다.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그때부터는, 조용히 숨어만 있던 권력이 다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