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김예슬'이라는 서울대 채상원씨에게 묻는다

[주장] 총학 선거 도청부터 해명해 글의 진정성 얻기를

등록 2010.04.02 15:47수정 2010.04.02 15:47
0
원고료로 응원
서울대에 '제2의 김예슬'이 등장했다는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때 내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고려대 '자퇴녀' 김예슬이 던진 작은 돌멩이는 그녀 개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 곳곳의 각성을 이끌어냈다. 비록 미약할지 몰라도 '김예슬 카페' 등에서 돌멩이들이 결집하고 있었고, 그녀의 선언처럼 싸움은 시작된 것만 같았다. 낡은 탑을 무너뜨리는 흐름이 눈에 보이고 있었기에 나는 '아, 또다른 돌멩이인가' 생각하며 반갑게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는 서울대에 누군가 또다른 대자보를 붙였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김예슬의 대자보 내용을 인용하며 시작되었다. 대자보는 12년간 환상을 바라보며 어렵게 들어온 대학생활이 낡고 답답할 뿐이며, 자퇴는 하지 않되 대학의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 싸우겠다고 했다. 대자보는 낡은 탑을 거부하고 새로운 탑을 세우자는 힘찬 주장으로, 김예슬의 대자보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내게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기사 말미에서 '사회과학대학 08 채상원'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이 글이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채상원'이란 이름을 본 순간 글의 진정성이 사라졌다

채씨는 작년 말 서울대 총학 선거에서 '예스위캔'의 선본장이었다. 작년 서울대 총학 선거는 선거 부정과 도청 사건 등으로 얼룩지며 파행됐다. 채씨가 선본장으로 있던 '예스위캔' 선본은 도청을 통해 다른 선본의 부정선거 의혹을 밝혀낸 바 있다. 부정선거도 잘못이지만 도청으로 이를 캐낸 것도 정당하지 못하다. 예스위캔은 도청 사건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채씨는 이번 총학생회 선거에 정후보로 출마를 준비중이다. 지난해 파행된 선거를 다시 하는 것이다. 채씨가 대자보를 붙인 것은 3월 29일.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후보자 등록 기간이다.

이 사실을 아는 내게 채씨의 대자보는 정치적 출사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선거 운동을 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다. 총학생회라는 방식으로 대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조금 비겁해 보인다. 왜, 지난해의 도청 사건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는가? 왜 대자보와 언론 인터뷰에 자신이 출마한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는가?

김예슬 이름 팔지 말고 당당하게 싸워 주길


지난해 선거를 지켜본 서울대 학생들은 채씨의 대자보에 냉담하다고 한다. 실제 31일 서울대에는 채씨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이 대자보를 붙인 박연씨는 채씨와 같은 사회과학대학 08학번이다. 박씨는 도청 사건으로 서울대의 퇴보를 가져온 당사자가 변화와 발전을 논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박씨 외에도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는 사전 선거 운동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붙은 채씨의 대자보가 정치적 주목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건 김예슬과 그녀를 필두로 한 수많은 돌멩이들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그렇게 쉽게 그녀의 이름을 빌려다 자신에게 이용해선 안 된다. 지난 잘못에 대해 서울대 구성원들에게 명백하게 해명하고 사과를 구해야 한다. 얼치기 '언론 플레이'로 비겁하게 주목을 구하지 말고, 정당하게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

아래는 박연씨의 대자보 글 전문이다. '침묵이 변화를 낳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채씨의 답변이 궁금하다.

서울대 '제2의 김예슬'에게 묻는다
침묵이 변화를 낳을 수 있는가?
-'제2의 김예슬' 채상원 학우의 대자보에 부쳐

도청 사건을 잊었는가?
전 예스위캔 선본원 채상원 학우,
당신의 선언을 책임지기 바란다

채상원 학우가 쓴 대자보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를 잘 읽었다. 나는 고려대 김예슬씨를 지지하고 글쓴이가 비판하는 내용에 공감한다. 그러나 글을 읽는 내내 줄곧 '나서서 싸우겠다'는 힘찬 결의를, 이 글을 쓴 채상원 학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채상원 학우에게 묻겠다. 당신은 전 예스위캔의 선본원이자 재투표 당시 선본장으로서, 작년에 있었던 총학 선거 부정 의혹과 당신이 속한 선본의 도청 사건,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란들을 기억하는가? 이 문제는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일단락되었고 더 이상 예스위캔이라는 이름의 선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글쓴이를 비롯한 예스위캔 선본원들이 도청 사건에 대해 보였던 안일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똑똑히 기억한다. 이 글을 보고 있는 수많은 서울대생들도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 글에는 작년의 논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다. 당신은 도청 사건을 잊었는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은 것인가? 과연 당신의 과거와 당신이 약속하는 미래를 별개로 생각할 수 있는가?

혹자는 이 글과 도청사건이 상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글의 요지가 '대학의 변화를 주도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겠다'라는 것이다. 변화를 약속하고 있는 '나'는, 다름 아닌 채상원 본인이다. 글쓴이는 변화의 신념을 가진 '채상원'의 이름으로 서울대생, 나아가 시스템의 고통을 겪고 있는 대학생 집단과 부조리한 사회에 보다 나은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그렇게 정의로운 말투로 사회를 위해 싸워나가겠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본인의 정치적인 행보를 둘러싼 의혹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변화라는 대의(大義) 앞에서, 과거의 의혹은 '제껴도 좋을 만한' 사소한 거리가 되는 것인가?

도청 사건을 해명하라.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과거를 없던 일로 치부하지만 말아달라. 매년 새로운 학생들이 유입되는 대학사회에서, 과거를 침묵하는 것은 과묵이 아닌 부정이다. 올해도 3000명의 새로운 구성원들이 유입되었다.

새 판이 벌어졌다고 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일을 결의한다고 해서 어제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대학생활의 '낭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당신의 글은 참을 수 없게 낭만적이다. 언론에서 앞 다퉈 당신을 '제2의 김예슬'이라고 미화하고 있다. 이 상황을 유치한 해프닝이라고 웃고 넘어가기에는, 대학사회의 미래가 너무나도 소중하다.

'제2의 김예슬'이 아닌 '사회과학대학 08학번 채상원'의 답변을 기다린다.

(정치학과 08학번 박연 본인은 특정 선본 소속이 아니며, '학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권자'인 것을 제외하고는 이번 총학생회 선거와 무관함을 밝힙니다. whatdidyousay@hanmail.net )

#서울대김예슬 #제2의김예슬 #채상원 #도청사건 #예스위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 4 일본군이 경복궁 뒤뜰에 버린 명량대첩비가 있는 곳 일본군이 경복궁 뒤뜰에 버린 명량대첩비가 있는 곳
  5. 5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