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용 두 마리가 조각된 머릿돌 아래 '대청황제공덕비' 라고 새겨져 있다
이정근
왼쪽으로 발길을 돌려 목멱산에 방향을 맞췄다. 길동무도 없고 목이 마르다. 주위에 인가도 없다. 얼마를 걸었을까? 길에서 약간 비켜선 허허벌판에 비각이 우뚝 솟아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모임지붕에 돌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출입문에는 자물통이 채워져 있고 비각 안에는 거북이 받침돌 위에 커다란 비석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이것이 북한강에서 끌어 오는데 두 달이 걸렸다는 장대석이구나."놀라웠다.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자세히 살펴봤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머리 돌 아래 처음 보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해독할 수가 없었다. 옆에도 역시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뒤로 돌아갔다. 전면과 같이 용 두 마리가 섬세하게 조각된 머리 돌 아래 '대청황제공덕비'라 새겨져 있었다. 순간, 꺽쇠의 심장이 멎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내 나라 내 강토를 짓밟은 적 괴수를 공덕으로 칭송하다니? 이런 쳐 죽일 놈들이 있나? 그것도 청나라의 요구가 있기 전에 공덕비를 세우겠다고 자청한 조정의 대신들. 공사를 지연시켜 청나라의 독촉을 유발케 하여 청국의 강요에 마지못해 공덕비를 세웠다는 모양새를 취하려는 임금. 알아서 기는 대신들과 잔머리 굴리는 임금. 모두 쓸어버려야 할 대상이지 살려둘 이유가 없는 쓰레기들이다."주먹을 불끈 쥔 꺽쇠가 입술을 부르르 떨렸다. 정축출성이란 미명 아래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삼전도 수항단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청나라의 우월적 지위에서 체결된 조약문 어디에도 비(碑)를 세운다는 조항이 없다. 비변사의 주청을 받아들인 인조가 청나라에 제의했다. 스스로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우겠다고.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인조는 청국에 잘 보이고 싶었다.
알아서 길테니 예쁘게 봐주세요청나라는 환영했다. 멋진 제안이지 않은가. 자신들이 짓밟은 조선 땅에 전승기념비를 세운다는 것 환상적이지 않은가. 조약 체결 당시, 황제가 수도를 비워놓고 조선 정벌에 나섰기에 심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황망한 상황에서 자신들이 놓친 것을 찾아주고 스스로 세우겠다니 기특하고 갸륵했다.
'대청(大淸) 숭덕 원년 겨울 12월, 황제가 우리나라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였으나 황제는 신민을 죽이지 않고 덕을 폈다'로 시작되는 비문을 읽어내려 가던 꺽쇠는 비문을 짓고 '글을 배운 것이 한이로다'라고 탄식했다던 이경석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이경전, 조희일, 장유. 당대의 문장이라는 이놈들. 좋은 일은 지놈들이 앞장서고 궂은일은 아랫사람에게 전가시키는 비열한 놈들. 퇴, 퇴, 퇴."비각에 침을 뱉은 꺽쇠가 발걸음을 돌렸다. 나루터 가는 길이다. 민회빈이 끌려갈 때 목 없는 시신이 나딩굴고 타다 만 주검이 너부러져 있던 길이다. 그 때와 같은 참혹한 광경은 없었지만 난리에 불타고 부서진 집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