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후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유성호
김예슬 선언은 우리들 가슴에 분명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그 울림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가슴을 쳤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관련 기사의 댓글들은, 스누라이프(서울대 커뮤니티)에 종종 익명으로 올라오는 가슴 아픈 고백들은, 그리고 관악 곳곳에 붙은 대자보들은 그녀의 선언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자 아픔이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여전히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 숨쉬려 하는 서로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고 난 뒤 난 다시 내일 1교시 수업을 준비할 것이다. 경제학 수업을 들으면서 아무런 주체적 생각도, 고민도, 비판도 없이 수업 내용을 필기할 것이다. 과제를 풀기 위해, 시험을 잘 보기 위해 필기 내용을 달달 외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젊은 날은 A로 가득찬 성적표로 보상받을 것이고, 졸업 후 높은 연봉으로 보상 받을 것이다.
매일 경쟁하고, 시험보고, 경쟁하고 시험보는 끝이 없는 서바이벌 게임. 16년이란 기나긴 학창 시절을 끝없는 경쟁으로 마감하면 취업과 직장생활이라는 또다른 경쟁이 기다리고 있겠지. 이러한 나의 청춘은 과연 푸르른가?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순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기계처럼 행해진 수업을 기계처럼 받아들인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서울대의 처참한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그 처참한 현실의 부역자가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노동자 말살하는 신자유주의 몰아내자!""서민경제 파탄내는 신자유주의 몰아내자!"지난 날 소위 운동권 친구들이 외치던 저 구호에 물론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렇게 외치려 한다. 우리 뼛속까지 스며든 우리 안의 신자유주의를 먼저 몰아내자고. 그리고 우리의 학교 서울대 안의 잿빛 신자유주의를 몰아내자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경쟁'대신 '협력'을 해야하고, '분열'대신 '단결'을 택해야하며, '개인'대신 '공동체'를 위해야하고, '효율'대신 모두를 위한 '비효율'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상대평가제, 학사관리엄정화 등의 사소한 구질서부터 교육을 시장에 내맡기는 법인화, 고액등록금을 저지해야할 것이다. 진짜 학문, 진리 추구를 위한 대학교육의 커리큘럼 재편을 위해 투쟁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사소한 질서와 제도는 물론이고 대학 전체와, 어쩌면 정권과도 맞서야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우리 모두가 신자유주의 질서의 피해자였음과 동시에 그것의 '부역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노예로 살 것인가? 꿈도, 청춘도 없이 더 나은 학점노예로, 더 높은 임금의 노예로. 그러나 서로 더 나은 노예가 되려 할 수록 대다수는 더욱 비참한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끊임없는 경쟁의 끝엔 더 살인적인 경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바늘구멍은 점점 더 좁아질 것이다.
주인으로 살 것인가? 그렇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대다수가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나서는 순간 대학은 변할 것이다. 마치 68혁명 때 서유럽 대학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학은 다시 자유와 낭만, 평등과 사랑이 넘쳐날 것이며 진정한 학문탐구와 진리추구로 빛날 것이다. 그것은 대학의 변화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이 변하면 세상도 변할 것이다. 마치 지난 날의 서유럽 국가들이, 북유럽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질서, 돈이 아닌 사람 중심의 질서로 세상이 재편될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은 우리 손에 달렸다신자유주의라는 구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새로운 질서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탄생될 것인가?
대안은 누군가 뛰어난 어느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탄생되지 않으며, 새로운 질서는 특별한 누군가에 의해 세워지지 않는다. 구질서가 몰락하는 지금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더 나은 행복을 위해 일어선다면 우리의 질서가 곧 신질서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머뭇거린다면 아마도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던 지배층이 다시 그들의 질서를 세울 것이다. 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세계의 탄생.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대학. 참다운 '진리'를 나의 빛으로 여기며 즐겁게 학문을 배우는 대학. 돈이 아닌 '사람'이 중심되는 대학.
모든 것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김예슬을 비롯한 많은 대학생 친구들에게 용기를 얻어 나 역시 선언한다.나 또한 우리를 억압하는 시스템의 부역자였음을.그리고 다시 선언한다.나 또한 노예가 아닌 인간의 길을 걸을 것을.대학 안에서 내가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대학을 만들기 위해나름의 방법으로 모든 구질서에 저항할 것을.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4학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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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처럼 나도 '노예' 아닌 '인간'의 길 걷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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