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36년이 지난 2010년 3월 서해 최북단의 섬 백령도 서남쪽 2.7km 해역의 바다 밑 40여 미터 지점에 생때같은 해군 병사 46명이 26일 밤에 침몰한 해군 제2함대 초계함 천안함(1200톤급) 배꼬리와 함께 6일째 갇혀 있다.
정부 당국과 언론은 이들을 아직 '실종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생존한계 69시간'마저 훌쩍 지났다. 69시간은 과거 바다에 가라앉은 잠수함에서 생존한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천안함의 경우, 사고 당시 폭발로 인한 충격과 부상, 바닷물 접촉으로 인한 저체온증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69시간은 최대치로 봐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전시도 아닌 평시에 이런 대형 사고가 발생한 것은 안타깝고 곤혹스런 일이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멀쩡한 배가 왜 두 동강이 났는지와 실종자 46명이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명확하게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당국의 사고 경위 설명은 오락가락하고 구조 대응은 허둥지둥하니 온갖 의혹과 추측이 난무한다.
물론 사고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반 토막 난 천안함을 인양해야 나올 수 있는 문제다. 또 추측에 근거한 예단은 혼선만 부추길 뿐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종된 46명이 대부분 갇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 함미를 발견해 구조를 시작한 시점이 이미 '생존한계'에 임박한 시각이었다는 드러난 '불편한 사실'만으로도 국민은 답답하고 먹먹하다.
더욱이 이러한 '불편한 사실'의 조합을 통해 접근할수 있는 '불편한 진실'은 이 정부와 군 당국이 36년 전의 부끄러운 수치의 역사를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4년 2월 22일에 발생한 어이없는 침몰사고 때도 그랬던 실수와 잘못을 2010년 3월에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36년 전의 실수와 잘못을 2010년 3월에도 반복하는 해군
우선, 대형 사고가 났을 때 사고의 규모를 결정짓는 초동 대응의 문제다.
국군통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28일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안타깝게 많은 실종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해군의 초동대응은 잘됐다"고 말했다. 김태영 국방장관도 29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초동작전은 비교적 완벽하게 이뤄졌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의원들의 거듭된 질타에 김 장관은 "해군은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기뢰탐지함을 바로 투입하지 못한 점 등은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한 발 물러섰다.
해군이 사고 해역에 가장 먼저 도착해 구조작전을 펼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사고 해역 근처에는 작전 중인 속초함 등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해군이 사고 해역에 일찍 도착하고도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것 또한 '불편한 사실'이다.
사고 당시 구조된 58명 가운데 56명은 해경이, 2명은 인천시 소속 어업지도선이 구하고, 해군은 '지원세력'에 그쳤다. 이에 대한 군 당국의 해명은 해군 고속정은 립(고무보트)을 갖고 있지 않고 고속정이 접근하면 너울이 심해져 오히려 더 빨리 침몰할 수 있어 해경의 고무보트로 구조했다는 것이다.
36년 전에도 그랬다. 사고 발생 이튿날 당시 엄영달 의원(신민당)은 국회 국방위에서 사고가 나자 부근 해상에 있던 민간유류 수송선이 두 차례에 걸쳐 40명, 어선이 20명, 잠수선이 40명을 구출할 때까지 해군 구조선이 나타나지 않는 등 출동이 늦어진 이유를 따졌다.
구조 때도, 배꼬리 발견 때도 해군은 뒷짐 지고 있었던 셈
천안함 선체 배꼬리(함미)가 26일 밤 최초 침몰 지점에서 18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도 배꼬리를 발견하기까지 꼬박 이틀(49시간)이나 시간을 허비한 점도 짚어야 할 대목이다. 여러 원인 분석이 있으나 천안함이 사고 발생 3시간 뒤에 침몰했는데도 뱃머리(함수)의 침몰 위치를 알리는 부표를 제대로 설치하지 못한 점이 과실이다.
침몰된 뱃머리와 배꼬리를 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해군 기뢰탐지함이 사고 발생 사흘째에야 현장에 배치된 것도 문제다. 사고 다음날 바로 기뢰탐지함이 현장에 도착했더라면 실종자 46명이 대부분 갇힌 것으로 추정되는 배꼬리를 좀 더 일찍 발견해 수색작업이 더 일찍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방장관도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시인했다.
기뢰탐지함 도착이 늦어지자 해난구조대(SSU)의 수색활동에만 의존해 허둥대던 해군은 현지 바다 사정에 밝은 민간 어선에 지원을 요청했고, 해군은 28일 저녁에야 백령도 장촌리 어촌계의 6.5톤짜리 까나리배의 어군탐지기로 잡은 배꼬리의 침몰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때까지 실종자 탐색구조는 이뤄지지 못했다. 구조 때도, 배꼬리 발견 때도 '당사자'인 해군은 '지원세력'으로 뒷짐 지고 있었던 셈이다.
보도에 따르면 군 당국은 이런 늑장 대처에 대해 "해군 소해함(기뢰탐지함) 9척은 모두 진해기지에 배치돼 있다"며 "27일 오전 소해함이 긴급 출동했으나 기동속도가 시속 22㎞로 느려 28일 저녁에야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고 해명했다.
36년 전에도 그랬다. 국회에 출석한 해군 참모차장은 출동이 늦은 이유에 대해 "사고 즉시 모함은 구명정을 보내 구조작업에 나섰으며 진해에서 급파된 구조선은 1시간 20분 후에 사고해역에 도착했다"고 해명했다.
병사와 부사관만 실종된 '불편한 진실'과 '어둠의 자식들'
마지막 남은 '불편한 진실'은 뱃머리에 있던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은 살아남았지만, 배꼬리에 있던 부사관과 병사들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엇갈린 운명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 당시 장교들은 뱃머리에, 병사들은 배꼬리에 몰려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배치는 천안함을 비롯한 초계함들이 유사시 전투를 지휘하는 장교들의 이동거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배 앞쪽에 '사관 구역'을 설정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엔진실과 탄약고가 위치한 천안함의 배꼬리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의 침실과 휴게실로 채워져 있다. 배의 흔들림이 덜한 선미 부분을 병사들과 부사관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뱃머리에 있던 천안함 함장이 배꼬리에 있던 승조원들에게 이함(배에서 탈출)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는 사실(김태영 장관의 29일 국회 답변) 앞에서 실종자 가족과 국민들은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36년 전에도 그랬다. 경험 많은 기간요원들은 대부분 살았으나 수영훈련조차 받지 못한 애꿎은 신병들만 죽었다. 이런 불편함은 1970~1980년대에 병역의 유무에 비유해 유행했던 '신의 아들'(병역 면제자)과 '어둠의 자식들'(병역 복무자)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불편한 현실' 앞에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초동대응은 잘됐다"는 발언은 국민의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또 네 차례의 안보관계장관회의와 백령도 현장시찰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력과 장비를 동원해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는 쉽게 국민들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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