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라는 말, 어때요?"

'먹튀 자본'과 싸우고 있는 발레오공조 노동자들

등록 2010.03.29 18:48수정 2010.03.29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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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라는 말, 어때요?" 둘레에 있는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봤다. 어떤 이들은 뭔가 '운동권'과 보통 사람들을 구분 짓는 말 같아서 싫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처음에는 낯설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은 말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함께 싸우는 사람들끼리 평등하게 부를 수 있는 좋은 말이라고 했다. 드물게는 '동지' 하면, '팥죽'이나 '섣달'이 먼저 떠오른다는 이들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고 다닌 것은 봄의 시작과 함께 만난 이들 때문이다. 지난 3월 4일 오전, 서울 사당동에 있는 한 아파트 앞에서 금속노조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들이 일하던 공장은 충남 천안에 있다. 그런데 이들은 왜 한창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생뚱맞게 아파트 앞에 와 있을까? 아직 너무 차가운 봄비를 맞으며 서 있던 이들의 손팻말에는 "해고를 철회하라"라는 구호가 쓰여 있었다.

 

발레오공조는 르노삼성이나 쌍용, GM이나 닛산 등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자동차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던 회사다. 지난해까지 20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일하던 이 회사는 1987년에 대한공조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그 뒤에 일본의 젝셀 사와 독일의 보쉬 사를 거쳐 프랑스의 발레오그룹이 이 회사의 주인이 되면서 2005년에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발레오그룹은 전 세계 27개 나라에 121개 공장을 두고 있는 그야말로 초국적 기업이다.

 

발레오그룹이 이 회사의 주인이 되고 나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먼저 노동조합에 가입돼 있지 않았던 사무직 노동자들이 절반 가까이 정리 해고됐다. 그리고 회사는 다른 회사에서 이름을 날렸던 노무 담당자들을 데려왔고, 2008년부터는 노동조합과 맺은 단체 협약도 무시하기 시작했다. 작게는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던 간식이나 음료수, 장갑 같은 것들이 줄어들었고, 심지어 일하던 기계가 고장 나도 부품을 구해 주지 않기도 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설날 선물을 없앤 것이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비누 세트를 하나씩 줬는데, 프랑스 경영진들이 우리 명절 문화를 몰라서 한 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치졸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두 달 동안 잔업과 특근을 거부하며 싸웠다. 연제문 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웃었다.

 

"한 달 평균 잔업 특근으로 30~40만 원 정도 받아요. 그러니까 경영진들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우리보고 3만 원짜리 비누 세트 하나 받겠다고 80만 원 손해 보면서 싸우는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거죠."

 

결국 설날이 지난 지 석 달이 다 돼서 설날 선물을 받았다.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해 못할지도 모르지만, 노동자들한테 정말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자존심이라는 말이 맞나 보다.

 

노동자들과 마찰을 거듭하던 회사는 2008년 말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금융 위기를 핑계로 물량을 크게 줄여 나갔다. 그리고 지난해 봄에는 노동자들에게 복지 축소와 임금 동결, 희망 퇴직과 임금 반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은 대안을 찾아보자고 했지만 회사는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25번이나 교섭을 했지만 번번이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대신 노동자들 사이에 '정리 해고를 할 거고 파업을 하면 공장을 청산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이건 완전히 장난하는 거죠.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공문만 보내는 거예요. 뭐 60명 해고하겠다, 90명 해고하겠다, 그러다가 전원 해고하겠다, 청산하겠다 하는 것까지. 완전히 일방통행이에요, 일방통행."

 

백열현씨 말처럼 회사의 일방통행은 거침없었다. 지난해 10월 8일 회사는 희망 퇴직을 공고하며 희망 퇴직을 신청하지 않는 사람들은 10월 30일자로 전원 해고하고 회사를 청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10월 한 달 동안 희망 퇴직을 신청하지 않으면 퇴직에 대한 아무런 보상이 없으니 빨리 신청하라고 가정 통신문과 문자 메시지로 압박했다. 불안해진 일부 조합원들은 퀵서비스로 배달된 희망 퇴직 신청서에 서명을 했다. 140여 명 가운데 40여 명이 그렇게 떠나고 100여 명이 남아서, 무슨 까닭인지 한 달이 늦어진 11월 30일에 모두 정리 해고당했다.

 

회사는 금융 위기 때문에 완성차 제조업체들로부터 주문 물량이 줄어서 경영을 계속 못할 정도로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핑계를 댔다. 하지만 그 전에 납품하던 물량을 중국과 일본에 있는 공장에서 역수입해서 납품하고 있는 것이 드러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물량이 줄어든 것이지만 사실은 임금이 낮은 중국이나 인도, 체코 같은 나라에 있는 공장으로 물량을 다 빼돌린 것이다. 그리고 회사는 계속 적자를 보고 있다고 했는데 회사의 부채 비율은 계속 낮아졌다. 회사 빚이 줄어들었으면 경영이 좋아진 건데, 빚 갚느라 쓴 돈을 다 지출이라고 해석해서 적자라고, 경영이 어렵다고 우긴 거다.

 

'먹튀 자본'이라는 말로 잘 알려진 초국적 자본이 한국 기업들을 사냥하는 시나리오는 대충 이렇다. 일단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유망한 기업들을 싼값에 통째로 사들인다. 그 다음 임금이 더 낮은 중국이나 동남아 지역의 다른 공장으로 기술과 시설을 옮긴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생산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하고 판매는 한국에 남아 있는 회사의 이름으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한국에 있는 회사는 완전히 문을 닫아 버리거나 아시아 영업 기지 정도의 기능만 남기고 사업을 줄여 버린다. 그러는 동안에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되고, 임금은 떨어지고, 노동 시간은 늘어난다. 심지어 하루아침에 회사 문을 닫아 버리고 노동자들을 길바닥으로 쫓아내는 일도 숱하게 일어난다.

 

발레오그룹만 해도 발레오공조뿐 아니라 경북 경주에 있는 발레오만도에서도 똑같은 시나리오로 노동자들을 쫓아냈다. 발레오만도 역시 발레오그룹이 인수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다. 발레오만도는 지난 2월 중순 외주화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핑계로 직장 폐쇄를 해 버렸다. 쌍용자동차를 헐값에 샀던 상하이자동차가 기술만 빼돌리고 가차 없이 내다 버렸던 것처럼, 발레오그룹도 발레오공조와 발레오만도에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

 

이날 만난 노동자들은 모두 짧게는 14년, 길게는 20년씩 발레오공조에서 일한 사람들이다. 고등학생 실습생 신분으로 일하기 시작해서 자기 인생의 절반을 보내 온 일터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스무 살 시절부터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같이 일하고 같이 살았던, 고향의 가족들보다 더 가족 같은 동료들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그 시절의 추억과 그 동안의 인생마저 바래지게 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그날부터 노동청, 발레오 한국 지사, 발레오 관계 회사, 프랑스 대사관과 대표이사 집 앞까지 갈 수 있는 곳은 다 다니면서 회사를 살리고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날 내가 천안에 있는 공장이 아닌 서울의 아파트 앞으로 노동자들을 찾아간 것도 그곳이 이들이 매일같이 1인 시위를 하는 대표이사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에는 발레오그룹 본사가 있는 프랑스까지 원정 투쟁을 갔다 왔다. 지금도 발레오공조의 노동자들은 회사가 버리고 간 공장에서 같이 자고 같이 밥해 먹으면서 자신들의 일터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를 바라고 있다. 조를 짜서 어떤 이들은 경주의 발레오만도 공장으로 그곳의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러 가고, 어떤 이들은 1인 시위를 하러 가고, 나머지는 공장 안에서 집회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끈질기게 싸우고 있다.

 

노동자들 싸움 가운데 쉬운 싸움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렇게 회사가 문을 닫고 청산해 버리는 경우, 특히 그 장본인이 '먹튀 자본'이라면 보통 그 싸움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발레오공조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강한 자신감이 비쳐 보였다. 연제문 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자신감이 괜한 호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1999년엔가 회사에서 임시직을 채용한 적이 있어요. IMF를 겪으면서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노조가 좀 위축됐을 때예요. 1년이 지나서 회사가 계약을 1년만 더 연장한다고 했어요. 정규직이나 임시직이나 같은 일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된다고 노조에서 막아 나섰죠. 그래서 전 조합원이 같이 싸워서 전부 정규직으로 채용했어요. 그리고 단체 협약에 앞으로 정규직만 뽑는다는 조항을 넣어서 그 뒤로 우리 회사에 비정규직은 한 명도 없었죠."

 

넉 달 가까이 100명의 조합원 모두가 공장 안에서 같이 먹고 자면서 싸움을 이어 간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일단 노조와 동료들에 대한 깊은 믿음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다. 그리고 믿음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아주 현실적인 요소인 투쟁 기금이다. 이들은 회사가 일방적으로(!) 개개인의 통장으로 입금한 퇴직금을 모두 모아서 투쟁 기금으로 쓰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알 거다. 20년을 근속하고 퇴직금으로 받는 돈이 봉급쟁이한테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그 돈으로 공장을 떠나 분식집 자리를 알아보겠다는 선택이 더 쉬웠을 텐데, 이들은 그 돈을 몽땅 모아서 기나긴 해고 철회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하루하루 희망보다는 절망이 무지하게(!) 많지만 아주 작더라도 그 희망을 보고 계속 이 길을 가고 싶다는 송진영 씨한테 그 '아주 작은 희망'은 언제, 어디에서 오느냐고 물어봤다.

 

"옆에 있는 동지들한테서 오는 것 같아요.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희망 퇴직하면 위로금 얼마 준다고 딱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나 저나 왜 고민을 안 했겠어요. 화도 많이 나고 힘들었죠. 지금은 오히려 맘이 편해요. 요즘 강당에서 다 같이 자는데 자다 보면 누가 와서 이불을 싸악 덮어 줘요. 알고 보니 불침번 서는 동생이에요……. 그럴 때 희망이 오죠."

 

국어사전에서 동지라는 말을 찾아보니 '목적이나 뜻이 서로 같은 사람'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름 아래 쓰여 존경과 흠모의 정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덧붙어 있다. 발레오공조 노동자들이 가는 길을 어떤 이들은 어리석다고 욕할지도 모르고 어떤 이들은 걱정스럽다 말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진짜 행복한 세상을 위해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뚜벅뚜벅 걸어 갈 수 있는 이들이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작은책>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3.29 18:48ⓒ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월간 <작은책>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발레오 #발레오공조 #발레오만도 #작은책 #일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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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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