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희비극

최근 서울 나들이 이야기

등록 2010.03.18 14:13수정 2010.03.1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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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잦아진 서울나들이

 

40여 년간 살았던 서울을 떠나 강원도로 온 뒤 가능한 서울 나들이를 자제하건만 최근 한 달 새(2월 19일부터 3월 18일까지) 이런저런 일로 서울나들이를 꼭 네 번 하였다. 오늘 오후에 또 서울나들이를 할 예정이니 매주 한 번꼴로 드나든 셈이다. 나도 나들이가 잦다싶어 곰곰 복기해 보면 꼭 갔어야 할 모임이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으로는 내 귀가 엷은 탓으로 잦은 듯도 하다.

 

지난달 20일 작가회에서 2010년 정기총회를 앞두고 의례로 각 회원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왔다. 초청장 끝에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총회 참석이 어려우신 분은 오는 2월 16일까지 전화나 이메일로 위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 붙어있었다.

 

마침 한 작품 출판 준비로 매우 바쁜 때라 예년 같으면 선뜻 위임 처리를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것은 그 며칠 전 도종환 사무국장이 그 무렵에 불거진 '문예진흥지원금 확인서' 건에 대한 서신을 받은 탓이었다.

 

'문예진흥지원금 확인서' 건이란, 문예진흥지원금을 받은 뒤 불법 폭력시위 사실이 확인될 경우 보조금 반환은 물론 관련된 일체의 책임을 지겠다는 확인서를 제출해야 3400만원의 지원금을 주겠다는 문화예술위의 공문에서 비롯된 일이다. 

 

…작가회의는 지난 시절 이보다 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감옥에 끌려가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책을 빼앗기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작가정신을 지켜낸 바 있고, 한 시대의 맨 앞에 서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민족의 현실을 걱정하고 정권의 부도덕함에 맞서는 일이라면 생존의 위협을 무릅쓰고 싸웠습니다.

 

문제는 이 어렵고 난감한 국면을 어떻게 슬기롭고 힘차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이사장이나 이사 몇 몇의 힘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작가회의 회원 여러분의 조직화된 지혜와 결집된 힘이 아니고는 돌파해 내지 못합니다.

 

임기가 거의 다 끝나 가는데 어젯밤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사무실에 앉아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이게 무슨 팔자인가 싶기도 합니다. 언론 보도를 접하며 궁금해 하시기도 하고, 놀라시기도 할 것 같아 지금 처한 작가회의의 현실을 회원 여러분께 있는 그대로 알려 드립니다. 회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조직 운영을 잘 하지 못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데 대해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찬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총회에서 뵙겠습니다. 2010. 2. 7. 도종환 올림

 

"총회에서 뵙겠습니다"라는 말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런 가운데 작가회의 담당 직원이 참석 여부를 묻는 전화에 망설이자 그는 "일단 위임 처리하시는 것으로 하겠다"고 하고서는 그편에서 전화를 끊었다.

 

저희들이 돈을 마다해!

 

막상 총회 당일인 20일 아침에 일어나자 왠지 참석해야한다는 어떤 위무감이 눌러 서울행 시외버스에 오르게 했다. 그동안 작가회의 평 회원으로 총회나 다른 회의에서도 한 마디 발언한 적이 없이 일방으로 듣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한 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지니고.

 

예년 총회와는 달리 일사천리로 여러 안건들이 넘어갔다. 아마도 그날 참석한 회원들은 본 안건보다 기타 안건에 더 관심이 많은 탓이었나 보다. 한 시간 남짓 만에 새 이사장 선출과 2010년 사업계획 승안 심의가 끝났다.

 

이어 문제의 '확인서' 안건이 상정되어 몇 회원의 갑론을박의 열띤 토론이 펼쳐지려는데 물러나는 전임 최일남 이사장의 한 말씀이 있었다.  

 

"여러분, 돈 없으면 지원 사업 하지 맙시다. 몇 년 기관지 안 내고 외국작가 불러다가 하는 사업 안 하면 어떻습니까? 나중에 문화부 장관이 예술위에 물어보겠지요. 작가회의 확인서 사건은 어찌 되었느냐고요. 그런데 우리가 지원금 받아 버리면 '적당히 잘 처리했습니다'라고 보고할 것이고 장관은 웃으면서 '그러면 그렇지 저희들이 돈을 마다해!'라고 할 것 아니냐. 그러면 작가회의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 말씀에 이어 "한 원로 지인이 만나자고 해서 회의 전에 만났는데 이름을 밝히지 말라면서 3400만 원짜리 수표를 건네주며 작가회의에서 쓰라고 하였다. 지금 내 입이 그 사람 이름을 말하고 싶어 간지러워 죽겠다. 재앙이 닥치니 더 큰 돈이 들어왔다. 깨끗하게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지원금 받지 맙시다"라는 말에 박수가 나오고 더 이상 토론이 필요 없는 결론이 도출되고 말았다.

 

나도 발언 준비 메모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지원금 3400만원으로 2000여 작가들을 길들이겠다는 아주 한심한 풍토 속에 사는 불행한 작가들이 아닌가. 아마 어느 재벌이 이 기사를 본다면 "자식들, 하룻밤 꽃값도 안 된 푼돈으로 작가들을 놀렸다"고 문광부 관계자들을 비웃었을 게다.

 

새 명함을 받은 소감

 

2월 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한 내근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반가운 인사말과 함께 초청의 뜻을 전하며 '보고 싶다'는 말에 꼼짝없이 승낙을 했다. 그는 내 딸 또래로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사이가 아닌가. 내 딸이 먼 곳에서 공부하고 있기에 나도 그가 딸처럼 보고 싶었다.

 

그날 다른 볼 일을 보고 오후 5시 무렵 촌놈 남대문 김 서방집 찾듯이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한 상암동 누리꿈 스퀘어 비즈니스 타워 빌딩을 묻다가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본 행사가 끝날 무렵 정운현 전 편집국장이 반갑게 맞았다. 나도 그분을 뵌 지가 오래라 더없이 반가웠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은 항일전선에서 33세에 불꽃처럼 산화한 한 파르티잔 때문에 만난 별난 인연이다. 그 인연은 꼬리를 이어 내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었고, 또 다른 인연은 그분의 따님을 내가 교실에서 가르쳤던 사이이기도 하다. 본 행사가 끝나자 뒤풀이 장소로 지하 맥줏집으로 자리를 옮기자 정 국장은 나에게 새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받고 보니 그분이 살아온 길과는 전혀 다른 새 길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앞서 울컥했다. 세상의 분위기에 잘 적응하며 살았더라면 지금쯤 메이저 언론사의 데스크자리나 그 이상 자리에서 능력을 한껏 떨칠 나이가 아닌가.

 

내가 다른 언론인을 통해 들은 바는 그분은 대한민국에서는 찾기 힘든 대단히 청렴 결백한 기자로 소개받았다. 내가 처음 그분을 만날 때까지도 전셋집에서 산다는 믿기지 않은 이야기에 '우리 언론계에도 한 인물이 있구나!' 하고 감동했는데, 타의에 의해 언론재단 이사직에서 해직 당했다니 이는 개인의 불행을 떠나 언론계와 나라의 인재손실이다.

 

매를 맞아야 할 사람이 채찍을 들다

 

사흘 뒤인 2월 25일 다시 서울에 갔다. 여의도에서 볼 일을 보고 시간이 있어 주책없이 언론사에 있는 한 제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박대치 않고 차 한 잔을 대접했다.

 

"선생님 우리 교육계 비리가 말이 아니더군요."

 

그는 요즘 교육계를 취재하는 듯, 자사고, 장학사 금품수수 따위의 비리들을 얘기했다. 언제 적부터 있어온 교육계 비리 이야기가 아닌가.

 

간밤에 잠시 뉴스를 보니 최고통치자가 나서서 교육계의 비리를 뿌리 뽑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비리 당사자들이 그 보도에 웃기는 말씀 하지 말라고, 또 엉뚱한 사람 잡겠다고 비웃고 있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느낀 것은 매를 맞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채찍을 들고 설치는 데 대한민국의 희비극이 있다. 이번에는 행여 왜놈 순사부장 아들이 독립군 아들 족치는 블랙 코미디와 같은 일이 벌어질 지도….

2010.03.18 14:13ⓒ 2010 OhmyNews
#서울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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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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