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소백산비로봉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리는 소백은 연화봉으로 이어진다. 우수도 경칩도 지났지만 소백산은 아직 한겨울이다.
임기현
우수도 경칩도 지났다. 후배와의 약속이 아니었으면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노곤한 휴일을 즐길 터이다. 봄나물 하러 가자고 조르는 아내에게 '아직 좀 이르지 않나'며 변명에 가까운 답변을 하고는 서둘러 배낭을 챙겼다. 현관문을 나서는 뒤통수에 '고런 식으로 해봐라'는 경고가 날아왔지만 봄날의 산행이 가져다줄 넉넉한 여유와 가슴 개운함을 생각하면 감당할 만한 일이다.
지역신문사에 다니는 후배 권군이 배낭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는 엉덩이를 조수석으로 들이민다. 소백산이 처음이라는 후배는 '최대한 짧은 코스로 가자'는 둥 '날씨는 괜찮겠냐는 둥' 잔뜩 오늘의 노고를 최대한 줄여보자는 수작을 건다.
"야, 소백산이라 해봐야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비하면 거저 먹기지. 제일 빡센 코스래야 3시간이면 간다. 내려올 때는 다리만 살짝 살짝들면 돼!""아니, 형님 거 꼭대기에는 눈도 좀 남아있다 카던데, 괜찮을시껴?"인터넷을 뒤져 본 모양이다. 그 말 끝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영상 10여도를 훌쩍 넘는 따뜻한 날씨에 눈이 있어봤자 대수롭지 않을 거라고 받아 넘기며 차를 출발한다. 목적지는 풍기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출발점인 삼가동매표소. 안동에서 가자면 가까운 탓도 있지만 처음부터 후배에게 큰 소리를 쳐 놓은 터라 비교적 등산이 수월한 단양 어의곡코스가 아닌 제법 힘들다는 소백산 남사면의 삼가동코스로 내심 결정해 버렸다.
봄날, 아직도 소백산은 눈 속에 묻혀 있다문제는 도착도 하기 전에 터졌다. 안동-영주 국도를 40여 분 달리자 저 멀리 소백산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따스한 봄날에 소백은 한 겨울이다. 아니, 아예 히말라야를 연상케 하는 설산이다. 입 벌리고 경악하는 후배를 흘낏 쳐다보며 다음 할 말을 준비해야 했다.
"보기에만 그래. 올라가보면 별 거 아냐. 등산로는 사람이 많이 다녀서 멀쩡해. 안봐도 2차방정식이다.""행님, 그래도 산은 깔보는 게 아이라던데. 거 뭐라카노 아이젠인가 뭔가 하는 거 있어야 안되겠능교?"내친 김에 아이젠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는 그랬다가 정말 등산로 상태가 심각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이 되어 조금 유연해지기로 작전을 바꾼다. 선배로서 최소한의 퇴로는 있어야 할 일이다. 사실 나도 소백산은 이제 겨우 두 번째다. 첫 소백산과 대면은 복학해서 대학 3학년 여름이었으니 만 20년이 넘은 셈이다. 실상 비로봉은 초행인데다 지금은 더군다나 저 멀리 보이는 소백에 눈이 허옇다.
"영주시내 들러서 아이젠 사자. 항상 대비는 해야지.""야아, 뭐 개코도 아이라 카드만. 이 행님 뭐라카노?" 권군이 낌새를 차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