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봉은사 법왕루 앞, 대형 전시판에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총무원장 자승)이 봉은사를 특별분담금사찰에서 직영사찰로 전환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 여러 편이 크게 붙어있다.
최경준
"명진스님이 오셔서 청정 도량을 만들었는데…….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네요."
14일 오전 9시 50분경, '연지'라는 법명을 쓰는 한 신도는 일요법회가 열릴 예정인 서울 강남구 봉은사 법왕루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를 비롯해 다른 신도들도 법왕루 입구에 설치된 대형 전시판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법왕루로 올랐다.
전시판에는 지난 11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총무원장 자승)이 종단 안팎의 비판론에도 불구하고 봉은사를 특별분담금사찰에서 직영사찰로 전환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 여러 편이 크게 붙어있었다. 신도들은 특히 <강남 봉은사 흔드는 '검은 그림자'>라는 제목의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의 칼럼을 주의 깊게 읽었다.
"우리 서명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신문 기사를 다 읽은 '연지'는 마침 법왕루 앞에 있던 한 스님을 붙들고 따지듯이 물었다.
"우리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서명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스님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연지'는 힘없이 돌아서서 계단을 올랐다. 기자가 다가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가슴 속에 쌓아두었던 말들을 쏟아냈다.
"명진스님이 오셔서 신도들도 많이 늘었다. 임기가 다 안 끝났는데, 지금 와서 저렇게 한다면 너무 슬픈 일이다. 명진스님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입 바른 소리를 많이 했다. 정치권에서 압력을 넣었을 것이다.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 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도, 밑에 충성스런 부하들이 이렇게 한 것 같은데, 부당하다. 봉은사는 아직 안정이 덜 됐다. 더 청량한 도량을 만들기 위해서 명진스님의 힘이 필요하다."'연지'는 오는 11월까지인 명진스님의 임기를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4년의 주지 임기를 보장하는 특별분담금사찰과 달리 직영사찰은 조계종 총무원장이 당연직 주지를 맡으면서 기존 주지는 '재산관리인'이 된다. 특히 재산관리인의 임면권은 총무원장이 갖는다.
'연지' 뿐이 아니다. 1100여명의 신도들로 가득 메워진 법왕루는 엄숙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였다. 명진스님도 법문을 하는 중간 중간 한탄 섞인 한숨을 토했다.
명진스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또 신도들에게 이런 상처를 남겨줘야 되는가, 또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야 되는가"라며 "이번 사태를 보면서, 눈물이 난다"고 탄식하자, 법왕루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진스님이 "봉은사 신도와 소통되지 않은 결정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선언하자,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기운을 얻는 신도들은 명진스님의 법문 한 마디, 한 마디에 큰 박수를 치며 화답했다. 총무원에서 이번 결정과 관련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지 않을 경우 전국 사찰과 신도들을 대상으로 '봉은사 직영 폐지를 위한 1000만인 불자 서명운동'에 돌입하겠다는 명진스님의 선언에는, 환호성까지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