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본 마을풍경작년 여름의 풍광이다. 따뜻한 봄이 빨리 오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임준연
곧, 이곳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것이지만 밥 먹고 외부와 소통하고 옷 입고 집짓기 위해선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벌어야 한다. 산으로 그득한 이곳에서 농업은(채취, 사냥을 포함) 판로의 한정성 때문에 경쟁을 낳는다. 그 판에 끼어들어 토박이와 경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남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한다. 좀 치사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잘난 체하듯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인가.
뭔가 다르리라고 기대하고 왔던 지금이 결국 도시에서 삶의 지향점과 다르지 않다면 문제다. 중심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다. 혼자면 상관없다. 스스로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책임만 지면된다. 가족의 가장이 되면 달라진다. 특히 아이가 있다는 것은 본인밖에 모르던 인간의 삶에 변화를 요구한다. 사는 곳과 생각하는 것은 달라도 지금 사회의 분위기로는 아이의 미래가 걱정스럽다는 점에서는 같다.
교육문제 만이라도
몇 년이 지나면 아이가 학교에 가야하는데 그게 제일 걱정이다. 공교육 중에서도 가장 뒤처진 곳으로 자타(?)의 인정을 받고 있는 곳이 바로 시골의 초중등학교다. 학부모들은 학교와 소통하길 부담스러워한다. 선생들은 인사고과를 위해 한번 들러서 지나가는 곳 정도로 인지하고 지금 교육과정을 개혁할 의지가 없다.
당연히 학부모들은 학교를 신뢰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도시로 유학 보낸다. 학생은 두셋만 남게 되고 선생도 학생도 힘이 나지 않는다. 학생 없는 학교엔 지원도 되지 않아서 학교 운영은 더욱 힘들다. 게다가 등하교 거리는 너무 멀다. 매일 버스타고 30리 거리를 통학해야 한다. 앞으로 인원이 더 줄면 폐교와 통합으로 학교가 더 멀어질 수도 있다.
학원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이곳엔 없다. 다니려면 30킬로 길을 차로 왕복해야 한다. 지금 이곳의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기껏 방학 때 친척집에 보내서 그곳에서 '수학'하고 돌아오는 식이다. 그것도 여유 있는 집이나 가능한 일이다.
아이는 어리지만 고민이 갈등을 낳는다. 나 좋고 가족 좋자고 사는 촌에서 장점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자연과 더불어서 흙을 밟고 뛰어노는 아이. 다 좋다. 아토피 없고 스트레스 덜 받는 아이. 그래. 그런데 부모로서 나는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해 주어야 하지?
도시와 경쟁이 불가능하다면
이곳에서 감히 경쟁도 되지 않는 도시의 문화와 교육시스템을 좆는다면 아이만 열패감에 잠기게 되는 것 아닐까. 집에서 기를까? 어차피 공교육은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 처는 집에서 아이를 마냥 놀리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피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사회성을 잃게 할 가능성이 있고 부모 밑에서 아이를 외롭게 만들 가능성도 크다는 판단이다. 그럼 방법은 별로 없다. 얼마 되지 않지만 동네 또래 아이들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동네 안에 있는 폐교가 너무 아쉬웠다.
고민과 갈등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해답으로 향한 길은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얼마 전 직업 교육으로 수강한 숲해설가 소양교육과정에서 들은 '숲유치원'이 나를 흔들었다. 독일과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시작하여 미국과 일본으로 퍼진 취학 전 아동 교육시스템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