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부인 명의로 생명보험을 대신 가입하고 부인이 꼬박꼬박 보험료를 납부했더라도, 보험계약 체결 당시 서면동의가 없었다면 보험계약은 무효로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부인의 서면동의가 없는 것에 대해 1심은 무효로 판단했고, 반면 항소심은 부인이 보험료를 납부해 왔기 때문에 추인한 것으로 봐 유효로 판단했으나, 대법원은 설령 추인했더라도 무효라고 최종 판단했다.

미국계 A보험사에서 세일즈매니저로 근무하던 J(53)씨는 1998~1999년 사이 자신의 영업실적을 올리기 위해 부인 명의로 4개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그런데 2003년 5월 부인이 집에서 살해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은 J씨와 큰아들을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으나, 뚜렷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다른 범인도 찾지 못해 결국 의문의 장기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이후 J씨와 아들 2명이 보험금 지급을 청구했으나, 보험사가 "이들은 유력한 용의자로 고의로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고, 망인이 서면동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 1심, 부인 서면동의 없는 보험계약 무효

이에 J씨와 아들 2명이 A보험사를 상대로 보험금 청구소송을 냈고, 1심인 서울중앙지법 제41민사부(재판장 배광국 부장판사)는 2008년 10월 "피고는 J씨에게 1억5000만 원을, 아들 2명에게 각각 1억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고는 이 사건 보험사고는 보험수익자인 원고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는 사안으로 고의로 망인을 해친 것이라며 보험약관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없으므로 면책돼야 한다고 주장하나, 원고들이 수사 초기 유력한 용의자로 조사를 받기는 했으나 혐의점을 밝혀내지 못했으므로 피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나 망인의 서면 동의서가 없이 생명보험에 가입한 2개는 무효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J씨가 3번째·4번째 2개의 보험을 체결할 당시 망인의 서면동의가 있었다거나 대리권을 위임했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부족해 무효이고, 설령 망인이 보험계약을 추인했다고 하더라도 유효로 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 항소심, 추인한 것이기에 서면동의 없어도 유효

하지만 항소심인 서울고법 제19민사부(재판장 고의영 부장판사)는 지난해 8월 서면동의가 없는 2개의 보험계약도 망인이 추인한 것으로 볼 수 있어 보험금을 지급하라며 J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이 사건 3번째·4번째 생명보험계약은 건강진단 중 특별진단을 요구하는 계약이어서 망인이 피고가 지정하는 건강진단을 받고 건강진단서를 각각 제출했고, 또 보험료가 망인의 계좌에서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5년 동안 이체된 점 등을 종합하면 망인이 보험계약 체결을 추인했다고 할 수 있어 위 보험계약은 유효이므로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 대법원 최종 교통정리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또 뒤집었다. 대법원 제1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사망한 부인에 대한 생명보험금을 지급하라"며 J씨와 아들 2명이 A보험사를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 일부를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4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은 부인이 3번째·4번째 보험계약 체결 직후 건강진단서를 제출했고, 보험료가 부인의 계좌에서 5년간 이체돼 보험계약을 추인한 것으로 보험계약이 유효하다고 판단했다"며 "그러나 J씨가 부인의 동의 없이 체결한 생명보험 계약은 상법상 '타인의 생명보험계약'에 해당하기 때문에 무효가 되고, 설령 추인했다고 하더라도 유효라고 판단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