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솟옷 빨래, 이즈음은 이러한 풍경이 마음에 썩 든다.
김수복
충북 옥천 무슨 전자제품 대리점이라는 곳에서 전화가 왔다. 세탁기를 보내려고 하는데 정확한 주소가 필요하단다. 무슨 느닷없는 소리냐고 하니 누이의 이름을 댄다. 그 사람이 내 여동생인데 당신이 어떻게 그 사람을 아느냐고 하니 세탁기 발송을 의뢰했고 대금도 이미 치렀단다.
여기는 전북 고창인데 옥천에서 여기까지 배달을 온다는 게 뭔가 커다란 낭비인 것 같아서 그 말을 했더니 껄껄 웃어댄다. 광주에 있는 물류창고로 연락하면 거기서 배송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몰랐다. 판매망이 그렇게까지 광역화되어 있는 줄을. 그나저나 심난하다. 어머니의 속옷을 비누칠해서 빠는 데도 이제 어지간히 이력이 붙어서 그럭저럭 해낼 정도가 되었는데 새삼스럽게도 세탁기라니.
솔직히 어머니의 속옷을 손으로 빨 때마다 이유도 뭣도 없이 더러 민망하기는 했었다.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달리 생각할 아무 이유가 없다고 제아무리 세뇌공작을 해봐야 그때 그 순간들뿐이었다. 처음에는 아예 안 보려고 애를 써가며 비누칠을 하고 헹구고 줄에 널 때도 얼른얼른 해치웠다. 걷을 때도 무슨 금기된 것이라도 만지듯이 살짝 외면한 채로 후딱 나꿔채서 다른 옷들 속으로 감춰버리곤 했다. 그게 무슨 '지랄'이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고 그저 웃음이나 나올 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이유 같은 것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남성용 속옷은 '빤스'라고 투박하게 불러도 얼마든지 괜찮을 것 같지만, 어떤 때는 '빤스'가 제대로 된 표현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여성용 속옷은 반드시 '팬티'라고만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색상에서부터 크기, 모양새 등등 '빤스'라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미안스러워지는, '팬티'라고 불러줘야만 제대로 된 예우일 것 같은 뭔가 은밀한 분위기가 어머니의 속옷에는 있었다.
게다가 나 자신은 팬티든 빤스든 속옷을 거의 입어본 적이 없었다. 남의 집에서 여럿이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할 일이 있을 때거나, 남녀혼성 그룹에 섞여 뭔가 일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서너 장 갖춰놓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속옷이란 일종의 구급약품 성격인 셈이었다. 속옷을 거부한 이유와 그 정확한 기원은 다소 애매하지만, 아마 풍욕의 즐거움을 알아가던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지퍼를 올리거나 내릴 때 가끔 살이 끼여 곤욕을 치르면서도, 속옷을 안 입었을 때의 헐렁하고 가뿐한, 결심만 굳히면 언제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할 수만 있다면 치마를 입고도 싶었지만, 치마야말로 어쩌면 남성용 의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차마 그것을 입고 다니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에 나 자신의 속옷을 빨아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아마 더더욱 어머니의 속옷을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게 민망스러웠을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누이가 왔을 때 우스개로 잠시 했었고, 누이도 역시 빙그레 웃는 것으로써 응답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이는 끝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창에서 옥천까지, 직선거리로는 얼마 안 되지만 버스를 4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까닭에 서울보다도 훨씬 멀어져 버리는 그 길을 가는 동안 생각에 또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 결과로 당장 세탁기부터 있어야겠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손빨래에 익숙해 있었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수건이든 뭐든 죄다 꺼내놓고 비누칠을 해서 박박 문질러대는 일종의 취미생활로까지 승격시켜 놓고 있던 참이었다.
"아야, 뭔놈의 세탁기를 보낸다는 것이냐?""세탁기가 세탁기지 뭔놈의 세탁기는 무슨, 하는 김에 냉장고도 지금 바꿨으면 좋겠지만 내 사정이 있으니까, 봄이 끝날 무렵에나 바꿔줄게.""뭐야? 냉장, 아니 그건 또 뭔 소리라냐?""뭔 소리는 무슨, 그게 어디 냉장고야? 그 안에 음식 넣어두었다가는 없는 병도 생기겠더라."
산 너머 산이라더니 꼭 그런 짝이다. 냉장고를 바꿔준다고? 허헛 참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세탁기는 그런대로 유용하게 사용할 일이 있겠지만 냉장고는 아니다. 전혀 아니다. 누이는 냉장고가 오래되어 반찬 맛이 달라지고 전기료도 많이 든다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니다. 전기료가 더 든다고 해봐야 한 달에 몇백 원이고, 반찬 맛이 달라진다는 얘기는 글쎄, 확실한 무슨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소문'으로나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