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호화 입학식 문제 있다

등록금을 내리거나 도서관을 살찌우라

등록 2010.02.23 15:29수정 2010.02.2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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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들이 정체성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하더니, 덩달아 입학식도 거리를 헤매고 있다. 지난주 대학 입학식에 갔다가, 교육의 외도현장을 보았다. 양적으로 고속 성장했을지 모르지만, 대학 본연의 정신을 상실한 우리 대학의 한 장면이었다. 추운 겨울에 '어린 입학식'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어른 대학'이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고 있었다.

바로 지난 주말 학부형 자격으로 참석했던 숙명여자대학교 입학식이다. 입학식 장소가 서울 청파동의 숙명여대 교정이 아니라, 송파구 올림픽 공원이었다. 입학식에 가면서도 굳이 입학식을 교정이 아니라, 학교 밖 체육관을 빌려서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차분한 대학 입학식 분위기가 아니었다. 입학식 장소인 올림픽 공원의 올림픽홀에서는 1부 입학식에 이어 2부로 축하행사가 펼쳐졌다. 화려한 조명과 유명 연예인들이 나오는 떠들썩한 공연이었다. 입학식보다도 축하공연이 2배 이상 오래 진행되었다.

분명히 주객이 전도된 행사였다. 미국에서 입학식 축하를 위해 참석한 선배 동문의 인사말은 축하공연 시간에 쫓겨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으며, 행사가 끝난 뒤 남은 것은 총장 환영사나 총동문회장의 축사 내용이 아니고 화려한 조명의 잔영과 유명 가수가 부른 노래의 울림이었다. 입학식은 들러리고, 정작 주인은 축하공연이었다. 실망스런 입학식이었다.

최근 이처럼 학교 밖 체육관을 빌리고, 유명 연예인을 부르는 '호화판 입학식'을 하는 대학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호화판 입학식은 지난해부터 시작되어, 올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숙대 뿐 아니라, 연세대와 숭실대가 그렇단다.

서울의 대학이 이러니, 일부 지방대도 따라해 고급호텔을 빌려 입학식을 하는 곳도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 대학에서는 "입학식에 신입생들의 참석률을 높이고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취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학의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런 호화 입학식은 분명 문제가 있다.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인 대학 스스로 입학식의 의미와 교육의 본질적 기능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학식은 신입생들이 자기 학교에 대한 애교심을 새기고 대학생활의 의미를 생각하는 마음의 다짐을 하는 자리다. 입학식은 또한 단순히 신입생만 참석하는 행사가 아니라, 교육의 3대 주체인 학생과 학부모, 교사(교수)가 함께 하는 자리다.


호화 입학식 대신 학생들의 등록금을 내리거나 도서관을 채워라

최근 대학들이 재정이 어렵다며 등록금을 인상하는 상황에서, 학교 밖 체육관을 빌리고 연예인들을 초청하는 데 수억 원이 드는 호화 입학식을 하는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다. 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취업후 학자금 상환제'를 도입하고 '등록금 상한제' 도입 등을 검토하는 데, 대학은 엉뚱한 곳에 예산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이 할 일은 호화 입학식 대신 등록금을 내리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런 비용의 문제 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 이뤄지는 호화 입학식은 본래 대학이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를 해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더욱 우려스럽다. 일부 대학 문제라고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일부 지방대학에서는 마침내 고급호텔까지 진출했다고 하지 않은가.

대학에 어느 정도의 낭만과 축제가 필요하지만, 대학의 본질적 기능은 교육이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비판적 진리탐구 정신과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교양, 사회생활에 필요한 전문성을 가르치는 곳이다. 대학의 첫 출발인 입학식부터 정체성을 잃으면, 나머지 대학 4년은 어디로 갈지 뻔 하지 않은가.

입학식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기본적으로 대학 교정에서 해야 한다. 교내 운동장이나 강당, 또는 체육관에서 하면 된다. 자기가 다닐 학교가 아닌 학교 밖 공연장에서 입학식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입학식은 실질적인 대학 생활의 시작인데, 대학 생활의 첫발을 학교에서 시작 해야지 어떻게 공연장에서 시작할 수 있는가. 신입생과 학부모가 첫 대면하는 장소가 대학이 아니라, 학교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교외의 공연장이라니.

교내에 모두 모일 수 있는 운동장이나 강당이 없다면, 단과대 별로 나눠서 입학식을 하면 된다. 단과대 별 소규모 입학식이 오히려 학생들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고 대학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신입생이 한꺼번에 한 자리에 모여 대규모 입학식을 꼭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야 입학식이 끝난 뒤 신입생과 학부모가 학교시설을 둘러보고, 교내 매점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미래의 대학생활을 함께 얘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입학식은 학부모가 자녀의 대학에 가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다. 졸업식에는 최근의 '청년실업 대란' 상황이 보여주듯 취업을 하지 못한 졸업생들이 참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교육의 3대 주체중 하나인 학부모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학교 밖 공연장에서 입학식을 한다는 발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부모가 보고 싶은 것은 연예인의 공연이 아니라, 자녀들이 공부할 대학의 시설과 교정이다. 학부모도 대학의 교정을 볼 권리가 있다. 대학행정 중에서 입학식과 졸업식은 무엇보다도 학생과 함께 학부모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사안이다.

미 대학, 입학식에 엘비스 프레슬리나 마이클 잭슨을 부르지 않는다

내가 오래전 신문기자 시절, 1년간 공부했던 미국 하버드대의 경우도 '하버드 야드'라는 교내 운동장에서 입학식과 졸업식을 한다. 학교 밖 다른 장소를 빌려 입학식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교정에서의 입학식이 따분하다고 느끼는 학생이나 학부모도 거의 없지만, 입학식을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대학이 앞장서 입학식을 가출시키는 나라는 아마 대한민국 밖에 없을 것이다.

입학식이 지나치게 딱딱하거나 엄숙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조촐한 의식이다. 입학식에서 지나친 재미나 즐거움을 찾아서는 안 된다. 입학식은 축제나 공연이 아니다. 기존 입학식이 딱딱하다면 일부 절차를 줄이거나 약간의 즐거움을 추가 할 수는 있겠지만, 한번 밖에 없는 대학 입학식을 무조건 재미 위주로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입학식이 아니라, 축제나 공연이 되기 때문이다.

입학식은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기 때문에, 조촐하면서 경건하게 하면 된다. 미국 대학의  입학식은 대부분 총장 인사에 이어, 선배동문이나 외부 유명 인사, 전문가를 초청해 대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강연을 듣는다.

대학이 정신이 나가지 않는 한, 학교 밖 공연장에서 연예인을 불러다 입학식을 하는 '입학식의 공연화'는 외국 선진국에서는 교육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입학식에 연예인들을 초청해 대규모 공연행사를 하는 우리 대학의 발상 자체가 놀랍다. 미국 보스턴의 하버드나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가 입학식에 엘비스 프레슬리나 마이클 잭슨을 불러 공연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자기 학교 출신 연예인도 아닌데, 굳이 수천만 원씩의 초청료를 주면서 이들을 부르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대학이 나서서 유명 연예인 공연을 주최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대학에는 봄가을에 별도의 축제기간이 있지 않은가.

굳이 신입생의 소속감을 키우고, 대학을 선택한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려면 입학식과 별도로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면 된다. 장소는 교내 강당에서 하고, 학교 출신 연예인이나 재학생 연주회 동아리가 축하해주면 얼마나 좋은가.

신입생 환영회라는 명목으로 일반 연예인들을 대학이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향락적인 대중문화를 대학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다. 학문을 추구하는 대학이 할 일이 아니다. 대학은 학문을 추구하는 교육기관이지, 결코 연예기획사가 아니다. 대학은 교육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호화판 입학식에 수억 원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 돈이면 수백 명의 저소득계층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거나 대학 도서관에 1만여 권 이상의 도서를 구입할 수 있는 액수다. 미국 명문대학들은 학비와 기부금, 자금운용으로 채워지는 예산이 우리 대학보다 훨씬 많으나, 연예인을 부르는 호화 입학식에는 한 푼도 사용하지 않는다. 미 대학의 예산은 대부분 연구 예산과 장학금 확충, 도서 구입 등에 사용한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지난 2001년에 펴낸 자료에 따르면, 미국 대학 도서관의 평균 소장 도서 수는 358만9천400권으로 우리 대학의 16만1천400권 보다 무려 22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술지만을 보더라도, 미 하버드대학 도서관 한 곳이 보유한 학술지가 약 11만종으로 우리나라 전체 대학도서관 학술지 보유량의 4배가 넘는다. 우리 대학들은 호화 입학식보다 도서관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가출시킨 입학식부터 교정으로 데려와야 한다

최근 언론에는 어느 대학교 총장이 입학식이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인기 연예인의 춤이나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물론, 총장이나 교수도 춤을 출 수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총장이나 교수에 대한 기본 평가는 학교 운영과 강의에 대한 수준으로 평가되어야지, 단순히 이미지나 이벤트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대학 총장이나 교수는 교육자이지, 연예인이 아니다.

아무리 다양성이 인정되고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지만, 어떤 경우에도 부차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앞설 수 없다. 호화 입학식이나 화려한 공연의 이벤트, 대중에 비치는 이미지는 대학이 추구할 본질적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학식 뿐 아니라 졸업식도 학교 밖의 체육관과 고급호텔까지 빌려 입학식과 졸업식의 '대규모화와 공연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춤과 노래가 즐겁고 재미있다고 아무 때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기본적으로 할 것은 하고, 지킬 것은 지킨 다음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

대학의 본질적 기능과 역할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봐라. 학교 밖에서 펼쳐지는 대학의 호화판 입학식은 당장 그만둬야 한다. 대학의 갈 길이 아니다. 이벤트나 이미지로는 결코 대학의 능력이나 서열을 나타낼 수 없다. 대학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해야 하지만, 교육의 본질까지 시류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

모든 사안에서 본질과 부차적인 차이를 잘 헤아려야 한다. 그 선을 넘어서도 안 된다. 대학 밖으로 과감히 뛰쳐나갈 것과 대학 안에 머물러야 하는 가치의 미묘한 차이와 경계를 구분하라.

미국 유력지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2008년 미 대선에서 당시 민주당 오바마 후보를 지지하면서 그 이유로 ""복잡한 문제에서의 미묘한 차이의 의미를 이해하는 통찰력"을 꼽았다. 교육의 역할은 바로 이런 미묘한 차이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는 통찰력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노(1/10억m)의 차이가 세상을 가르는 시대에, 우리 대학은 아직도 '뉴턴의 미터(m) 시대'에 뒤처져 있는 듯하다. 그런 나노의 진실을 찾는데 스승 역할을 할 대학이 방황하고 있다. 입학식과 교육을 향연의 길거리로 스스로 내몰고 있지 않은가.

대학이 지나치게 이벤트나 이미지를 추구하면 교육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망한다. 지금 당장 대학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아니 자신들이 학교 밖으로 가출시킨 입학식부터 빨리 교정으로 데려와야 한다.
#호화 입학식 #대학의 위기 #숙명여대 #교육의 정체성 #등록금 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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