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애국지사의 생존 당시 모습.
김봉수
김종성(1906~1977) 지사의 '일왕 히로히토 주살 미수' 의거는 단독 거사였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조직의 소행으로 몰기도 했지만 사실은 '큰 뜻'을 품고 적국(敵國)에 건너온 한 조선 청년의 준비된 의거였다.
김 지사의 의거는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이봉창 의거(1932년)보다 3년 앞서서 감행된 역사적인 의거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나 자료란 거의 없는 '묻힌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봉창 지사의 정신적 지주는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한인애국단원이었던 이 지사는 백범의 지도 아래 히로히토를 처단하기 위한 거사를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감행했다. 그렇다면 김종성 지사에게 적국의 수괴를 처단하겠다는 기백을 심어준 정신적 지주는 누구였을까?
김 지사의 정신적 지주는 무명 한학자로 추정된다. 김 지사의 고향 전남 무안 해제에서 훈장 생활을 하던 잠와(潛蝸) 김용수 선생은 조국이 일제에 짓밟히자 왜놈 세상을 보지 않겠다며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사옥도라는 작은 섬에 식솔들을 데리고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던 꼿꼿한 선비였다.
스승 '잠와'는 제자 김종성에게 한학뿐 아니라 일제에 대한 의분과 독립 의지를 가르쳤다. 김 지사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컸던 것 같다. 19세이던 1924년 스승에게 '나라를 되찾는 큰일을 하고 오겠다!'고 하직인사를 마친 김 지사는 자신이 신던 고무신을 벗어놓고 대신 가난한 스승의 짚신을 신은 채 적국 일본으로 향했다. 이 같은 사실은 조부의 기록을 정리한 잠와의 손자 김화중(66·중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직)씨를 통해 밝혀졌다.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김 지사는 조선 민중들의 참상을 목격했다. 일본인들에게 천대와 학대를 당하는 민족의 아픔 앞에서 의지를 거듭 다진 김 지사는 24세가 되던 1929년 6월 4일 일왕이 오사카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날 오전 9시 히로히토(裕仁)를 주살(誅殺-죄를 물어 죽임)한 뒤 할복자살로 최후를 마치기 위해 비검(匕劍)을 품고 환영 군중 속에 대기하던 김 지사는 거사 직전에 일경에 체포되면서 일왕 주살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오사카 형무소 698호 감옥에서 6년간의 옥고를 치르던 김 지사는 1935년 특사로 풀려났다. 히로히토가 이해 득남(둘째아들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의 경사를 맞아 자신과 관련돼 투옥된 이들을 사면하면서 가까스로 풀려난 것이다.
초야에 묻힌 가난한 애국지사... 세상 떠난 뒤 추서된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