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동 101호 현관 앞에는 이곳이 대추리 마을회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김도균
경기 평택시 팽성읍 송화3리 포유(For U) 빌라. 이곳은 미군기지 이전에 맞서 고향을 지키기 위해 3년 6개월을 싸워왔던 대추리 주민 41가구, 120여 명이 모여 사는 임시 주거 단지다. 마지막까지 토지 수용을 거부했던 대추리 주민들은 지난 2007년 2월, 정부와 이주에 합의한 후 원래 살던 곳에서 3Km가량 떨어진 이곳으로 이사했다.
지난 2006년 말 <오마이뉴스>는 '올해의 인물'로 대추리 주민들을 선정했다. 일제 때 한 번, 한국전쟁 시기에 다시 한 번 삶터에서 쫓겨난 대추리 주민들은 수십 년간 피땀을 흘려 척박한 황새울 들녘을 개간해 문전옥토로 만들었기에, 당시 다시는 밀려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관련기사 -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날까" 2006년 대추리 주민들의 희로애락)
2004년 미군기지 이전이 결정된 이후 '국익'이라는 이름의 망령에 맞서 삶의 터전을 온전히 지키려던 대추리 주민들은 힘들었지만 당시까지 3년간 꿋꿋하게 싸우고 있었다.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려는 수많은 '지킴이'들의 연대도 끊이지 않았다. 경찰과 용역업체 직원, 군까지 동원된 대규모 강제철거 작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던 대추리 주민들의 싸움은 2007년 3월 24일 935번째 촛불행사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이곳 송화리에서는 주민들이 땀 흘려 농사를 짓던 황새울 들녘이 보이지 않는다. 미군기지 활주로를 중심으로 먼저 살던 곳에서 정반대쪽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스산한 겨울바람 사이로 미군 헬리콥터가 낮게 날고 있었다. 105동 101호 앞에는 파란 아크릴 판에 흰 글씨로 '대추리 마을회관'이라고 쓴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마을 회관에서는 출장 진료를 나온 보건소 직원이 20여 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혈압을 재고 있었다. "농사일에서 손을 놓으신 후로는 어르신들이 잔병치레가 많아지셨어요." 신종원(48) 대추리 이장의 말이다. 이제 이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신 이장과 김지태(51) 전 이장, 단 두 사람뿐이다. 그나마 차로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충청남도 둔포, 당진, 서산 등지에 조금씩 땅을 사서 출퇴근하면서 농사를 짓는 형편이다.
"보상금 많이 받았냐는 비아냥, 대추리 주민 두 번 죽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