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오디뮤지컬컴퍼니
<맨 오브 라만차>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다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보고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곡이 끝날 때쯤 감정이 고조되더니 커튼콜에 거의 대부분의 관객들이 기립박수로 답하고 있을 때 내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뮤지컬을 보고서 눈물을 흘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만차의 사나이 돈키호테, 어릴적 읽었던 동화속의 돈키호테는 그냥 한 시골 늙은이가 이미 옛날 얘기가 되어버린 기사도 책들에 심취, 헛된 망상에 빠져 사고나 치고 돌아다니면서 온갖 웃음거리를 만들어내는 코미디극으로, 괜히 엉뚱한 상상으로 주제 넘는 짓 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그냥 그저 그런 인물에 불과했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 본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세르반테스의 원작 <돈키호테>에 대해 과거에 가졌던 이러한 선입견을 깨끗이 날려버렸고 오히려 영국의 위대한 희극 작가 세익스피어보다 더 훌륭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대체 왜 상당수 뮤지컬 매니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로 <맨 오브 라만차>를 꼽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맨 오브 라만차>에는 여느 상업적 뮤지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능적인 댄스나 현란한 춤, 아크로바틱도 거의 없는데다 뮤지컬 관객의 대다수를 점하는 여성들이 선호할만한 낭만적 로맨스조차 없다. 이 뮤지컬에 빠져들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아마도 세르반테스가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 '꿈 꾸는 자, 행복하다'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불필요한 전환을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스펙터클이 뛰어난 무대, 화려하지 않지만 상당히 잘 어울리는 의상들도 제 몫을 하는데다 여러 재관람 관객들이 지적하듯 주제곡인 '이룰수 없는 꿈 The Impossible Dream' 을 비롯 '내게 뭘 원하나? What Does He Want of Me', '둘시네아 Dulcinea', '맘브리노의 황금투구 Golden Helmet of Mambrino', '슬픈 표정의 기사 Knight of The Woeful Countenance' 등 계속 귓전에 맴돌면서 흥얼거릴 수 있는 훌륭한 뮤지컬 넘버들이 많은 것도 큰 장점이다.
정성화와 류정한이 더블캐스팅을 맡은 돈키호테, 이혜경과 김선영이 더블인 알돈자, 산초 역의 이훈진, 죄수들의 캡틴이자 극중극의 여관주인 역의 민경언 등 주요 역할들과 앙상블이 모두 배역을 잘 소화해내고 있는 덕에 커튼콜이 끝나고 막이 내려가는 그 순간까지 무대 속으로 쏙 빨려들어가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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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1월 26일 있었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프레스콜 하이라이트를 담았다. ⓒ 문성식
'현실은 진실을 가린다'는 돈키호테의 외침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렸다<맨 오브 라만차>는 단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내용만을 쫓아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작자 세르반테스가 주인공이 되어 자신이 쓴 소설 <돈키호테>를 자신과 함께 갇힌 죄수들 앞에 극중극 형식으로 펼쳐보이면서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가 단지 소설속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세르반테스 자신의 모습이며, 꿈 꾸는 우리는 모두 돈키호테일 수 있다고 말한다.
<맨 오브 라만차>에서는 뮤지컬이 아니라 마치 연극이라도 보는듯 와닿는 대사들이 참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현실은 진실을 가린다'라거나 '가장 미친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말들은 내 심장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와 박혔다. '현실은 진실을 가린다'는 말은 결국 현실이 이러 저러하니 진실에 다가가려 괜히 헛된 노력하지 말고 그냥 생긴대로 살자는 사람들을 일컷는 듯 하다.
그랬다. 나는 극중에서 이말을 듣고서 불현듯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출정식 출마연설 중 '모난 돌이 정 맞는다'란 부분이 갑자기 내 머릿속에 오버랩되어 오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동영상의 연설내용을 찾아보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눈치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육백 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해본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수 있는 역사를 만들수 있다."<맨 오브 라만차>에서 돈키호테가 외치던 바로 그 소리. "현실은 진실을 가린다"가 이렇듯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 순간부터 극 중 돈키호테의 모든 행동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 행적들과 참여정부시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특히 극중극 형식으로 진행되던 돈키호테의 막바지 부분에 나오는 거울의 기사 대목은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전까지 조중동과 이명박 정권의 검찰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거울의 기사들이 거울에 비친 돈키호테의 늙고 나약한 모습을 통해 돈키호테를 꿈에서 깨어나게 하듯 보수언론들과 검찰권력이 합작하여 퇴임한 대통령에게 행한 피의사실 공표를 비롯해 도저히 인간에게는 행할 수 없어 보였던 작태들이 결국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듯이 거울의 기사에 의해 꿈을 잃어버린 돈키호테는 기운마저 급격히 떨어져 세상을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