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의 수업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한글교실 학생들. 대다수가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인생에는 내공이 있는 분들. 미용실 한글교실 팀의 평균연령은 62세 정도이지만, 평화자료관 한국어 강좌 팀은 비교적 젊다.
전은옥
수업의 절반은 수다이다. 대신 수업시간을 길게 잡기 때문에 진도는 확실히 나간다. 일본어는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카나 등을 섞어 사용하지만 글자수나 발음의 종류가 매우 간소하다. 게다가 한국어와 일본어는 문법과 어순이 쏙 빼닮았다. 또 한국은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필자는 제법 한자에 노출되고 한자를 공부할 기회가 많은 한국인이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 사람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
미용실 반이 아니라 다른 그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한국어는 확실히 일본어와 문법은 거의 같지만, 문자의 양과 발음 때문에 상당히 어려워요."라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미용실 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기우라 씨는 글자를 써야 입밖으로 발음도 낼 수 있고, 그래야 외워진다면서 항상 모든 글자를 일일이 적어가면서 발음을 한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나중에 혼자서 공부할 때 쓰면 안 돼요? 다른 사람들이 기우라 씨가 노트에 전부 적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배우고 연습할 것도 많은데 수업이 느려져."라고 핀잔을 주는 이도 있다. 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수업이 한참 진행중일 때 니시쿠비 씨의 소개로 도중에 참여하기 시작한 와타나베 씨는 학구파이다. 나가사키 시내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판 새만금이라 할 수 있는 갯벌 매립과 간척사업으로 생명의 바다와 갯벌을 상실한 마을 이사하야로부터 기차를 타고 30분 가량 달려, 다시 전차를 20분 정도 타고 수업을 받으러 온다. 그것도 항상 빈손이 아니다. 선생님에게 맛있는 간식을 먹이는 것이 작은 낙이라면서, 달큰한 앙꼬가 가득 든 만쥬나 빵, 주먹밥과 도시락, 귤 등 매번 먹을거리를 챙겨오는 마음 씀씀이가 참 이쁜 '학생님'이시다.
첫단계부터 배우지 못해서 혼자서 헤맬까봐 걱정했으나 금세 다른 급우들을 뒤쫓아 왔다. 다른 배움의 동지들이 전혀 예습, 복습을 하지 않을 때 혼자서 예습, 복습을 하면서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반에는 또 다른 열혈 학구파가 있다. 역시 작년 10월에 새롭게 합류한 새 얼굴인데, 현직 대학교수다. 피폭자 평화운동가인 히로세 씨가 사모님의 병환 간호를 위해 수업을 그만 둔 이후로 줄곧 한글교실의 청일점이다.
대학교수인 토다 씨는 환경운동, 평화운동 등 시민운동이 이루어지는 다양한 현장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손발이 부지런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원자력발전소나 핵과 석유문명, 담배와 자동차, 군수산업과 전쟁 및 낭비적인 선진국형 생활양식에 반대하는 토다 씨는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는 필자에게 단독 과외를 받았다. 그러나 역시 공부는 함께 해야 제맛이라면서 공부보다 만남과 교제가 주목적인 이 한글교실의 학생으로 입성했다.
이 두 명의 학구파는 수업 분위기가 산만해지면 불평을 할 만도 하거늘, 절대 불평하는 얼굴을 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즐겁게 공부할 수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속도의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과 함께 한국어 수업을 하면서 필자는 새삼스럽게 모국어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쉽게, 더 정확하게, 조금이라도 더 재미나게 가르치기 위하여 연구를 거듭하다 보니, 그 사이 나 역시 모국어인 한국어를 즐기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그 한국어를 배워주는 일본 사람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일본어도 한층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은 거꾸로 뒤집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나의 일본 '학생님'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괴로운 표정을 하다가도 "질문 있어요."라고 손을 들고, 배운 것은 틀리더라도 실습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면, 수업을 마친 뒤 집 방향이 같아 함께 전차를 탄 학생님은 내가 먼저 내릴 순간이 오자, "'안녕히 가세요.'라고 하는 거에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는 거에요?"라고 재확인하거나 "수고하셨습니다. 또 만나요."라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사람의 성씨, 예를 들면 다나카 히데오라는 사람이 있으면 '다나카 상(씨)'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은 사람의 성에다 '씨'를 붙여서 부르면 실례가 되니 이름이나 풀 네임으로 불러야 한다고 알려주었더니, 금세 "은옥씨"라고 상냥한 목소리로 선생님의 이름을 부른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온천에 간 적도 있다. 누드로 함께 노천탕에 들어가 피로를 풀거나, 한국식 지짐이를 부쳐 먹기도 했다. 푼푼이 돈을 모아 선생님의 가이드를 받으며 한국여행을 가자는 '한국여행계'에 대한 제안도 오래 전부터 나왔다. 미용사인 기우라 씨는 일반 고객이라면 고액의 비용을 받았을 텐데, 가난한 학생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다면서 내게 일본문화체험 일환으로 기모노를 입혀 주고,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장식해 주었다.
새빨간 기모노를 입고 야외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노부부가 "오늘 평일인데 결혼식해요?"라고 물어왔다. 기우라 씨는 "나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나라 전통의 복식과 머리 모양을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나도 일본의 전통복식과 머리 모양을 전하고 싶어요. 그게 내 꿈이에요."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