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군이 총사업비 17억9097만원을 투입해 용추계곡 '지우천 하도준설사업'을 하면서 이 주변은 굴삭기와 크레인이 동원돼 공사장을 방불케 할 만큼 흉물로 변해버렸다. 사진 위쪽은 하천 공사를 하기전의 모습이고, 아래쪽은 공사 후 폭탄을 맞은 것 마냥 하천이 파괴된 모습이다.
김용만
공사장으로 변한 용추계곡 "맑은 계곡과 울창한 원시림, 빼어난 절경으로 진리삼매경에 빠졌던 곳이라 하여 '심진동' 이라 불리는 안의 용추계곡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돈을 들여서 이렇게 아름다운 계곡을 파괴하는 곳은 함양군 밖에 없습니다."
용추계곡에 대해 |
용추계곡의 원래 지명은 '심진동 계곡' 이지만 용추사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지금은 인근 일대가 모두 용추계곡으로 불린다. 용추사는 원래 덕유산 장수사의 4대 부속 암자중 하나였다.
장수사는 신라 소지왕 9년(487)에 각연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해인사 창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보다 315년 앞서는 고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전쟁 당시 공비토벌이라는 명목 하에 아군에 의해 소실되어 일주문을 제외하고는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용추사의 전신인 장수사는 설파 상언대사가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강의했던 유명한 곳이다. 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발자취를 감추고 세상에 숨어서 암자에 살았던 곳이 바로 은신암이며, 무학대사가 은신했던 이 암자는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게다가 1792년 연암이 안의에 물레방아를 설치하면서부터 "함양산천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 집의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도네"라는 민요도 생겨난 유래깊은 곳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용추폭포야 네 잘 있거라, 명년 춘삼월 또 다시 만나자"라는 길 군악도 알고 보면 '용추 질굿내기'라는 함양 민요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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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간 함양군 안의면 하원리 내동마을 주민들과 함양예술마을 관계자들은 '용추계곡'이 처한 상황을 하나 같이 이렇게 묘사했다.
자연 그대로 1000년 이상 보존된 생태계가 용추계곡 '지우천 하도준설사업'이란 명목 하에 공사장을 방불하게끔 삭막하게 바뀐데 대한 원망 섞인 탄식이었다.
지우천 하도준설사업이 이뤄지는 안의 용추계곡은 지난 1914년 안의군이 폐지되기 전 '안의 삼동' 가운데 하나로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최고 문장가이자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1780년 '열하일기'를 통해 물레방아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뒤, 12년 뒤 정조의 부름을 받고 안의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연중 수량이 풍부한 용추 계곡 입구인 안심마을에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실용화가 된 곳이다.
지금 이곳엔 '함양예술마을'이 들어서 유리공예, 목공예, 천연염색, 동양화, 판화 등 다양한 예술체험이 상시 가능하게끔 체험시설이 갖춰져 함양의 관광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또 약초재배농가와 약초시장 활성화를 추진하기 위해 '함양약초생활관'이 완공된 상태로 개관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공사가 이뤄지는 지우천은 용추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 안으로 굽이쳐 흐르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곳으로 연암 선생이 최초로 세운 물레방아와 거리가 가깝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안의현 동헌이 있던 지금의 안의초등학교와 안심마을 지우천 거리는 4㎞로 가깝다. 연암이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간절함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물레방아를 만들면서 이를 상용화시키는 등 실학을 실천하는데 앞장선 이유다.
지금 이곳 지우천은 수많은 굴삭기와 크레인이 동원돼 공사장처럼 변했다.
함양군청 "재해방지" VS. 주민들 "직접 피해 입은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