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비비에는 '길야은선생칠대손수익지비'라고 적혀있다.
하주성
충절을 지킨 길재의 7대손인 길수익 만고 충절을 지킨 충신 길재의 7대손인 길수익. 길수익은 영릉의 수호군으로 이곳 왕대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왕대리는 바로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이 있는 곳의 산 뒤 마을이다. 이곳에 길수익의 효자정문이 내린 것이 1670년이고, 효종대왕의 능은 1673년도에 이곳으로 옮겨졌으니, 길수익은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수호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륜가(五倫歌)'에 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도리가 적혀있다. 7대조인 길재는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에도 오른 인물이었으니, 그 자손인 길수익이 부모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풀속에 저 까마귀 반포한줄 알았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부모은혜 잊을소냐새벽에 일찍깨서 문안부터 먼저하고즐기시는 음식으로 정성들여 차려드려부모한번 잡수시면 자식된맘 기뻤어라이즉하면 시장할까 날이차면 추워질까부모님이 하고자 하는일 앞서가며 먼저하고부모앞에 항상 있어 편안케도 하자꾸나오륜가 중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도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효자 길수익은 이러한 오륜가를 익혔을 것이다. 왕대리 앞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고기를 낚다가 물에 빠져 헤매자, 아버지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든 길수익. 그러나 끝내 아버지를 구하지 못하고, 함께 물에 빠져 고혼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길수익의 효를 높이 기리고자, 현종 9년인 1670년에 효자정문이 내려졌다. 지금도 왕대리의 마을 안에 있는 정려각과 비. 후대에 자손들의 귀감을 삼고자 조성된 이 비각 옆에는, 커다란 향나무 한그루가 있다. 그런데 이 향나무 가지들이 모두 밑으로 처져있다. 아마 길효자의 효스런 마음에 감읍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