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여성과 어린이부터 탈출시킨다는 대원칙은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1등석의 여성과 어린이 먼저 구출시키는 것이 침몰하는 배의 현실이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20세기 폭스 코리아
힘을 가진 공간을 그들이 독점할 수 없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입시지옥을 비난하기만 한다고 입시지옥이 해결되나? 아니다. '반란'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누구말마따나 "공부해서 서울대 가는 것이 제일 쉬웠다"는 개개인의 차이를 무시한 무식하고도 심각한 과장은 곤란하지만, 적어도 '반란'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입으로 비난하는거야 쉽다. 하지만 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문제를 향해 덤벼들어야 한다. 두들겨패듯 덤벼들어도 좋고, 놀이하듯 덤벼들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덤벼든다는 것 그 자체다.
이것이 일본의 사쿠라기와 한국의 강석호가 말하려던 것일 듯하다. 입시지옥이라고 비난하기만 해서야 과연 해결이 될까? 권력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선 권력을 향해 덤벼들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권력으로부터 속지 않는다. 정치에 무관심한 유권자들이 많을수록 정치인들이 신나는 이유와 똑같다.
"주입식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던 수학교사의 숨겨진 과거천하대 특별반 수학교사는 "주입식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고 강변한다. 고리타분한 옛날방식의 교육관을 그대로 갖고 있는 교사다. 원작만화와 헤어스타일까지 똑같이 그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달동네 공부방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면서도 호통과 회초리를 동원한다. 구세대 교사의 전형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그가 '달동네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상황이다. <공부의 신> 속 그의 과거 회상 장면에서도 중요한 것이 있다.
비행 청소년을 강하게 호통치며 공부시켜 그를 '각성'시키면서 그가 결국 의대에 진학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훗날 의사가 된 그는 수술에 성공해 환자 가족에게 인사를 받으며 뭉클한 감동에 젖는다. 하던대로 힘 없는 아이들을 두들겨패고 '삥'이나 뜯던 그 나날들을 이어갔다면 그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까?
<공부의 신>이 원작의 숨은 진의를 이어갈 것 같다는 예감을 한 장면이기도 했다. 변호사 사쿠라기가 시도하던 것과 똑같다. 다시 한번 얘기한다. 동경대, 혹은 천하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잘못된 현실을 고치기 위해서 처절하게 노력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건네는 것이다.
물론, "주입식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는 표현은 절반만 맞다. 주입은 교육의 기본인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식 교육에서 부재한 것은 주입 그 자체만 있다는 것, 주입과 응용이 조화해야만이 훌륭한 교육이다. 교육방식에 대해서야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학교사의 '달동네 공부방'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학비가 비싸기 때문에 무조건 대학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다. '입시지옥'이 말 그대로 '지옥'이 된 이유는, 학부모 대다수의 '입시지옥'에 대한 어긋난 오해 때문이다. 대학을 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됐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이유 모를 공부를 강요한다. 입시지옥이 지옥이 된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참을성 있게 깨닫도록 도와주는 학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지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을 가는 것 그 자체'가 부작용인 이유는 고급교육을 통한 사회적 기여를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얀 거탑>의 장준혁이라는 캐릭터는 이 부작용의 적격이다. 외과 정교수가 되려는 야심은 있다. 하지만 외과 정교수로서 어떻게 환자들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지는 고려 밖이다. 대학을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런 각각의 요건을 무시하고 그저 드라마만 비난하면 다일까?
누구도 전문계 교육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몇 년 전, '모 공고 사태' 당시에 나는 엄청난 비난 세례에 노출됐다. 아파트단지가 세워져 초등학교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모 공고의 부지가 초등학교 건설부지로 선정돼 공고가 이전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대다수의 여론과 달리 나는 아파트 주민들의 목소리에 비중을 뒀다. 땅값과 집값에 연연하는 주민들의 앞잡이로 보일 것이란 예상을 충분히 하면서 뒀던 승부수였다. 왜 그랬을까? 과연 나도 아이들을 공고생이라고 무시했던 것일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주목했던 것은 공고가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부정적인 인상이었다.
정말 논의가 이루어지려면 근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논쟁했어야 했다. 전문계고가 왜 부정적인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일까? 입시지옥을 비난하는 이들도 누구도 이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입시지옥 비난은 절반에 그치고 만다. 아무리 명문대학을 진학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며 힘을 기르는 수단임은 분명하지만, 누구나 그럴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모 교육평론가는 이 부분을 거론하며 "<공부의 신>이 사람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다"고 비난하지만, 그것도 비난을 위한 비난에 머무르는 이유가 된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는 대학 진학 외에는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세상에 나아가 꿈을 키울 수 있는 수단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전문계고는 공부 외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대안이 돼야 한다.
하지만 세상 인심도, 소위 말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그들에 대해서는 고민의 비율이 부족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조선시대의 잘못된 유산 '사농공상'의 폐해가 여전히, 하지만 더욱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잘못된 관습도 영향을 준다.
말뿐인 비난만 하기엔 교육과 진로의 문제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입시지옥 비난론이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입시지옥과 값비싼 대학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전문계고가 힘을 얻도록 다양한 정책과 길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의 눈은 그저 '입시' 그 뿐이다. 현실이 그렇게 작용하니 현실에 뛰어들어 현실을 뜯어고치는 방법이 남는다. <꼴찌 동경대 가다>의 사쿠라기와 <공부의 신> 강석호가 웅변하는 것은 바로 그 이야기다.
KBS 드라마이기에 드러나는 작은 흠진보 성향의 논객들과 교육전문가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공부의 신>에서 무능력한 선생들의 대명사로 나오는 병문고의 교사들이 마치 '전교조'처럼 묘사됐던 부분일 듯하다. 그와 더불어 "교육도 서비스"라고 외치는 강석호에게서 이명박 대통령을 느꼈을 것이란 점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흠이다. 전교조를 향한 왜곡된 공격을 그대로 반영했다. KBS이기에 드러나는 흠일 것이다. 하지만 전교조를 향한 공격은 예상외로 학부모들에게 설득력을 제공한다. 국제중과 특목고로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도 마다하지 않는 학부모들이라 왜곡된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여서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거기에 안주해서야 언제든 강석호에게 공략당하는 것이 전교조의 엄연한 현실이라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