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1.21 14:53수정 2010.01.2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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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후배 결혼식에 여자 선생님이 주례를 맡은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여자 주례선생님이 결혼식 집례하는 것을 이날 처음보았습니다. 마산 가곡 전수관 조순자 선생님이 결혼식 집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결혼식 주례는 꼭 남자가 해야한다는 편견을 말끔히 해소 할 수 있었지요(관련기사 2009/11/25 : 어~ 결혼식 주례가 여자야 !).
새해 들어 지난 10일 함께 모임을 하는 또 다른 후배 결혼식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주례가 없는 결혼식을 하더군요. '이분에게 꼭 주례 말씀을 듣고 싶다'할 만한 분도 마땅히 없고, 그렇다고 결혼식장에서 권해주는 판에 박힌 주례사를 하시는 분을 모시기도 싫어 신랑, 신부가 머리를 싸매고 결혼식을 준비했다고 하더군요.
오늘은 여느 결혼식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한 번 소개해 봅니다. 결혼식은 사물놀이패의 신명나는 연주로 시작되었습니다. 보통 이런 공연은 결혼식 끝부분 축가나 축하공연 순서로 진행되는데, 이날은 결혼식 시작을 알리는 공연이었습니다. 결혼식 시간이 다가오자 식장 밖에서부터 꽹가리, 장구, 북, 징소리가 들리더니 결혼식장을 한바퀴 돌아 하늘과 땅에 울리는 경쾌한 연주로 혼례 시작을 알려주었습니다.
신랑이 대학 시절부터 풍물 동아리 활동을 하였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틈틈히 풍물 모임에 참여하는 신랑과 인연을 쌓은 분들이 흥겨운 사물놀이 가락으로 혼례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몇 년전부터 1년에 한 번씩 사물놀이 공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답니다.
위의 사진은 신랑, 신부가 혼인서약을 하고 있는 모습니다. 결혼식에서 혼인 서약은 주례 선생님이 "OOO군, OOO양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믿고 의지하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고 존경하며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라고 물을 때 큰소리로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날 결혼식의 주인공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직접 작성한 혼인 서약을 가족, 친지, 친구들 앞에서 함께 읽으며 공개 약속을 하였습니다. "내조의 여왕'이 되겠다고 하는 신부의 서약이 결혼식 하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습니다.
혼 인 서 약 서 |
나 신랑 김OO은 장OO를 아내로 맞아 이웃과 사회 공동체에 본이 되고 사랑받고 존경받는 구성원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멋진 가장이 되겠습니다.
나 신부 장OO는 김OO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가정의 화목과 부모님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이끄는 내조의 여왕이 되겠습니다.
나 신랑 김OO과, 나 신부 장OO는 매사에 자연과 환경을 조금 더 생각하며 행동하겠습니다.
자녀를 키움에 있어'내 주변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그릴 수 있는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사랑과 존중으로써 서로를 대하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가정을 중심으로 생각할 것이며 언제나 웃음꽃이 피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겠습니다.
우리 부부는 위의 약속들을 지키며 아름답게 살아갈 것을 여러분들 앞에 엄숙히 맹세합니다.
2010년 1월 10일
신랑 김OO, 신부 장OO |
주례사 못지 않은 신부 아버지의 편지
주례사 대신에 신부 아버지께서 결혼하는 딸과 새로 맞이 하는 사위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주셨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보나 차근차근 당부 말씀 막힘없이 해내는 능력으로 보나 주례를 맡으시기에도 손색이 없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였지만, 혼례에 참석해준 하객들에 대한 인사,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는 신랑댁 가족들에 대한 당부, 결혼하는 딸과 사위에 대한 당부 말씀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셨더군요.
결혼식이 끝난 후에 주변 사람들과 "신부 아버님이 주례를 맡았어도 손색이 없었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많이 공감하였습니다. 아마 몇 년 전에 신랑 아버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으셨다면, 두 분이 나란이 주례 말씀을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에게 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 결혼식을 보면서 결혼식 주례는 양가 부모님들이 나누어 맡으시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결혼하는 두 사람을 가장 잘 아는 양가 부모님들이 신랑, 신부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씀도 하시고, 결혼식을 축하해주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판에 박힌 주례사 보다는 훨씬 감동적인 주례사를 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