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바랐던 아이티, 두번 죽일 수는 없다

2008년 포르토프랭스에서 만난 아이들을 생각하며

등록 2010.01.21 14:56수정 2010.01.2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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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을 기저로 삼는 아이티 아이들. 하루 1인당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가구가 많다.
가난을 기저로 삼는 아이티 아이들. 하루 1인당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가구가 많다.문종성

20일, 또다시 진도 6.1의 강력한 지진이 아이티를 강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2일(현지시각) 리히터 규모 7.0의 지진이 일어나 아이티(Republic of Haiti) 수도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를 아비규환의 상태로 만든 지 고작 8일이 지났을 뿐인데 말이다.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이곳에 대한 내 기억은 2008년 여름에 멈춰져 있다. 자전거를 끌고 2007년 5월경 세계 비전트립을 떠난 난 이듬해 7월 말경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작은동네에 도착했다.

난 번화가에서 벗어난 변두리에 짧은 여정을 풀었다. 이곳에 월드비전센터를 세운 박병준 선교사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필요에 따른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는 교육지원 및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계 최빈국이면서 이방인의 진입을 억압하는 가장 위험한 나라로 알게 된 땅에 발을 내딛는 건 큰 모험이다. 급작스런 문화 충격에 완충역할을 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그래서 더 반갑다.

아이티는 세계 최초로 흑인노예들에 의해 주도된 민중혁명과 헌법에 의해 수립된 흑인 공화국이다. 하지만 뒤발리에가(家)의 독재와 부패 여파로 도탄에 빠진 정치와 빈곤의 악순환은 치안부재를 일으켰다. 강력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UN군도 두 손 놓고 있었다. 이런 땅을 홀로 여행하기란 너무 큰 위험 감수를 요구한다.

판자촌에서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며 진흙쿠키를 먹는 라틴 아메리카 최빈국이면서 무분별한 나무 연료 사용으로 산림의 98%가 파괴된 붉은 사막의 현현은 아이티의 지금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줄 만큼 넉넉했던 풍요의 나라는 이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잊힌 채 살아가고 있는 '신이 버린 땅'이 되었다.

모든 게 생경했던 혼돈의 땅 아이티에 퍼진 '통곡'

 도시 곳곳에서 UN군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지만 강력범죄를 차단하기엔 역부족이다.
도시 곳곳에서 UN군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지만 강력범죄를 차단하기엔 역부족이다.문종성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의 대통령궁. 파란 하늘 아래 백색의 건물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의 대통령궁. 파란 하늘 아래 백색의 건물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문종성

나는 혼돈의 땅의 모든 것이 생경스러웠다. 동정과 두려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내가 머무는 동네는 범죄의 온상 지역이었다. 박병준 선교사 역시 수차례 도난을 당한 터라 특별히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먹고 덤비는 상황에선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단다. 그들을 이해하고 안아주며 가장 가까이 교제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척박한 환경에 자신의 소신을 펼칠 공간을 마련했다.


점심을 들고 찾아온 나른한 낮이었다. 서재에 꽂힌 한홍의 <남자는 인생으로 詩를 쓴다>는 책을 꺼내 침대 위에서 뒹굴며 읽다 문득 창틈으로 새어 나온 소리를 들었다. 두 집 건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리듬과 가락의 조합이 필시 교회 찬송임이 틀림없었다. 주중 대낮에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나는 이내 다시 독서에 몰입했다.

어슬해질 무렵,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때였다. 그들의 외침은 여전했다. 노래도 부르고, 중간 중간 간절한 기도도 드렸다. 기도라기 보단 절규에 가까웠다. 벌써 네다섯 시간 동안 그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예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마당에 조촐한 저녁상을 차리고 우리는 어둠을 끌어안았다. 밤이 되자 그들의 외침은 아예 통곡이 되어 조용한 동네 구석구석으로 퍼져들었다.


"믿음이 참 좋은가 보네요. 낮부터 저렇게 쉬지도 않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찬송 부르네요."

아이티는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피부로 느끼기엔 부두교와 무신론자의 수가 적지 않다. 통계의 허구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곳이 바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아이티 같은 빈민국이다. 박 선교사는 짐짓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글쎄,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저들은 지금 생사를 두고 치열하게 기도하는 거랍니다."

약 살 돈 없어 '기적'을 바라는 아이티 사람들

 아이티 허름한 노점. 그나마 이 물건들도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해 시작하는 것이란다.
아이티 허름한 노점. 그나마 이 물건들도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해 시작하는 것이란다.문종성

 내전과 약탈 등으로 폐허가 된 마을 앞 길거리에서 음식을 만드는 청년. 남루한 천막이 아이티의 현재를 말해준다.
내전과 약탈 등으로 폐허가 된 마을 앞 길거리에서 음식을 만드는 청년. 남루한 천막이 아이티의 현재를 말해준다.문종성

종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아이티 현지 노(老)목사의 집이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거동조차 불편한 채 집에 누워 있었다. 중병이 의심 되었지만 스스로 몸을 가눌 형편이 되지 못했다.

"병원에서 건강검진이나 치료는 물론 약 구입조차 엄두내지 못합니다."

하루 빨리 병원에 찾아가야 했다. 하지만 소득 대비 살인적인 의료비 때문에 변변한 건강검진 한 번 받기가 힘들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기본적인 병원비도 내기 어려운 가구가 전체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질 낮은 공공 의료 서비스마저도 이들에게는 사치다. 치료보다 우선 먹을 것부터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통곡의 소리는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 되었다. 식사 후 티타임을 갖는 중에 별안간 전기가 나갔다. 마을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불빛이 사라지자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박 선교사는 아주 능숙하게 초를 찾아 불을 켰다. 이 지역에서 정전은 흔하디흔한 일이다. 잠시 멈췄던 기도소리도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소리가 잦아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약을 살 돈조차 없어 기적을 바라는 그들은 밤까지 버티다 겨우 기도를 마무리하고 집을 떠났다. 흐릿한 가로등 아래로 힘없이 걸어가는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가난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진료가 아닌 기도뿐이었다. 치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도 그저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픔을 통곡하는 아이티 사람들.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은 기적 말고는 없다"

 진흙쿠키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 1달러에 20여개 정도하는 흙으로 만든 쿠키도 돈이 없어서 마음껏 사 먹지 못한다.
진흙쿠키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 1달러에 20여개 정도하는 흙으로 만든 쿠키도 돈이 없어서 마음껏 사 먹지 못한다.문종성

 판자촌에 사는 아이들. 아이티 정부는 언제쯤 불행한 역사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판자촌에 사는 아이들. 아이티 정부는 언제쯤 불행한 역사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문종성

이튿날 박 선교사는 약국에 들렀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목소리까지 쉬어 버린 목사에게 통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약사에게 전해 처방전을 받은 것이다. 그가 매번 약을 구입해 주지만 언제까지나 약으로만 버틸지는 미지수다.

사유재산은 물론 교육, 의료 등 공공 서비스 분야의 높은 벽에 절망으로 기대는 아이티 서민들. 그들은 하늘에 자신의 운을 맡긴다. 그래서 가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자의 기도는 더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적을 꿈꾼다.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은 기적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아이티 사람들은 당장에 천지개벽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작은 기적을 기도한다. 빵과 우유가 놓여있는 소박한 밥상, 범죄 없는 안전한 동네, 그리고 아플 때 찾아갈 수 있는 문턱 낮은 병원. 바로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기적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문종성 기자는 지난 2008년 여름, 자전거를 타고 아이티를 여행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문종성 기자는 지난 2008년 여름, 자전거를 타고 아이티를 여행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http://www.vision-trip.net
#아이티 #자전거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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