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2일 오전 용산참사 화재현장에서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 등이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형사재판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재판절차는 엄격하게 공정해야 하고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에 맞서 피고인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 국선변호인 제도나 미란다 원칙 고지와 같은 제도가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수사기록을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제공하라고 명령하고서도 이를 거부하는 검찰에 대해 어떠한 불이익이나 사법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호인들의 거듭된 촉구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헌법위반행위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무작정 재판을 강행하고 구속기간 만기 전 선고에만 급급했다. 이 때문에 공판과정을 지켜본 방청객이 '이게 재판이냐'라고 말했던 것이고, 필자는 1심 재판부가 피고인의 손발을 묶어 검찰이 샌드백 치듯 일방적으로 피고인을 두들겨 패도록 해놓고서 피고인이 쓰러지자 검찰 손을 들며 KO판정을 한 '샌드백치기 재판'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항소심 재판부가 최근 수사기록을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제공한 것은 그나마 1심 재판의 잘못을 바로 잡아 피고인들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한 점에서, 그리고 향후 검찰은 피고인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수사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를 피고인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를 명백히 한 점에서 의미가 참으로 크다.
하지만 뒷맛은 영 개운치 않다. 검찰이 스스로 수사기록을 내놓은 것도 아닌데다 수사기록 공개가 위법하다며 즉시 항고하는가 하면 용산참사의 항소심 재판부에 대해 기피신청을 하는 등 종전 입장을 바꿀 뜻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기갑 의원에 대한 무죄판결까지 뒤따르자 쑤셔놓은 벌집이 따로 없을 정도로 사법부를 맹공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검찰의 이런 태도는 정말 이중적이다.
"공판단계에서도 검사는 이렇게 수사단계에서 자신이 수집한 모든 증거를 법원으로 넘겨주어 공판절차의 주재자인 법원이 실체적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협조하여야 하는 것이고, 공판과정에서 법원의 활동이 적정한지 감시하고 견제하며, 공판과정에서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활동도 하여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판결에 대하여 피고인에게 유리한 상소도 하여야 하는 것이다. … (중략) … 본 판례는 검사의 객관의무를 인정하고 그 전제하에 검사가 공판단계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은 것을 이 의무에 위반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하였고 이 결론은 타당하다고 본다."한마디로 수사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는, 그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것이든 유리한 것이든, 법원과 피고인에게 제공할 의무가 있고 이를 제공하지 않으면 검사의 객관의무를 위반한 위법행위라는 것이다.
이 글은 용산참사 재판을 맡고 있는 변호인이나 형사소송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쓴 것이 아니다. 이 글은 2004년 7월경 당시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으로 재직하던 모 검사가 쓴 <검사의 지위와 객관의무>라는 논문의 일부다.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이라면 검찰에서 형사소송제도를 연구하고 검찰의 입장을 밝히는 사람의 일원이지 않은가.
가관인 것은 용산참사 수사기록의 공개거부가 헌법위반이라며 피고인들이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용산참사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은 것이 검사의 객관의무 위반도 아니고 헌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라는 취지로 검찰 의견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사람이 바로 위 논문을 작성한 검사라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곡학아세'(曲學阿世)의 표본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곧 용산참사 이전의 형사사건에서 검찰은 '검사는 준사법기관이고 공익의 대변자'로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자료를 제출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해 오다가 용산참사 수사기록에 대해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돌연 입장을 바꾸어 피고인들에게 수사기록을 제출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이 정권의 방위대 노릇 한다는 인식 뿌리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