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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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말기 1895년. 일제의 횡포가 극에 이르러 마침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해였다. 바로 그 해 김홍집 내각은 백성에게 단발령을 명했다. 허수아비 임금 고종의 이름으로 발표한 근대화개혁이었다.
단발령 공포 당일에 고종과 태자가 대표로 머리를 깎았다. 역사에 이만큼 참혹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이란 결코 함부로 못하는 것이라 여겼던 조선 백성들에게 이는 통한의 굴욕이었다. 수많은 선비와 유생들이 단발령에 저항했다.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은 "내 목은 자를 수 있어도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편 군인의 총칼이 지배했던 대한민국의 1970년대는 경찰이 가위와 곤봉을 들고 장발족 남자들을 추격하던 시절이었다. 군사정부는 머리털에 풍기문란이라는 죄를 뒤집어 씌웠다. 100년 전이나 40년 전이나 단발령은 지배권력이 백성을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수작이었다.
엄혹한 시대에 머리털은 저항했다. 야만의 시대였다. 이제 길거리에서 머리털을 붙잡혀 가위로 뭉텅뭉텅 잘리는 광경은 사라졌다. 적어도 밖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가위질에 머리털이 싹둑 잘리고 있다. 기막히게도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국민이 그런 체험을 하고 살았다. 바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실에서다.
"머리 깎기 싫으면 전학 가라"나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보통의 학교가 짧은 머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졸업생의 마음을 여전히 복잡하게 한다. 그러니 재학생은 오죽할까 싶다.
당시 나름대로 '범생이' 축에 들었던 나는 교칙을 슬금슬금 피하면서도 큰 사고는 치지 않았다. 하지만 1개월 단위로, 심하게는 1주일 단위로 돌아오는 두발검사는 괴로운 기억이다. 엄청나게 맞았다. 선생님이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후릴 때면 눈앞에 불똥이 번쩍거렸다. 사실 거의 학교에서 주거하며 '집으로 통근하는' 고등학생의 생활은 다람쥐가 쳇바퀴를 굴리는 모양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고등학생에게 머리털은 거의 유일한 자의식 표현, 아니 자존심의 영역이다. 나도 다른 교칙은 잘 지켰지만 두발만큼은 슬슬 눈치 보며 저항했다. 정말이지 너무 꼴사납지 않는가. 두발 단속을 피하기 위해 갖가지 편법을 동원했지만 대부분은 나의 패배로 끝났다.
학생들이 집단으로 저항하자 학교는 아예 이발사를 모셔서 가위질을 했다. 논리로 따지고 드는 학생에게 선생님은 "싫으면 딴 학교로 전학 가라"고 엄포를 놓기 일쑤였다. 두발 문제에 있어서만큼 학교는, '지성의 공간'이라 불릴 자격이 없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남학생에게 요구하는 '스포츠형 머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남성의 중요한 부분을 닮았다 하여 조롱의 대상이 된다. 이발하고 최소한 2주 동안은 얼굴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없다. 심한 수치감과 굴욕감을 감당하며 애써 표정 관리한다.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렇게 외설스러운 머리통을 쳐들고 어찌 당당할 수 있단 말이냐. 이는 인간적 자존심의 문제다. 어른들은 어리고 시시한 객기라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학교라는 아이들의 공동체에서 이는 진지한 고통이고 걱정이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머리 깎기 싫어 자퇴를 택한 아이도 있었다.
다른 대형 사건도 터졌다. 몇몇 아이들이 밤새 학교에 숨어들어 교장 선생님이 애지중지하는 비석에 빨간 락카칠을 한 것이다. 그래서 교문 옆 비석에는 교가와 교훈 대신 '두발자유' 진홍글씨가 통쾌한 위용을 뽐내게 되었다. 학교 당국이 열심히 지웠지만 아직까지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 그들 나름대로 절박한 시위였다. 이 사건에 관련된 아이들은 자퇴하거나 전학을 갔다. 평소 학교가 '불량학생' 취급을 하던 아이들이었지만 학생 여론은 공감과 동정이었다.
'고등학생' 최익현은 두발검사를 통과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