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우리동네 이장 선거

등록 2010.01.05 13:09수정 2010.01.0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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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 동네 연말 총회가 있사오니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타고 동네 방송이 너울너울 흘러나온다. 동네 방송은 나같이 겨울날 집 안에 틀어 박혀 있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소식이지 동네 사람들에게는 소식 이랄 것도 없다. 방송 나오기 전에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겨울철에는 동네 주민의 대다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밥도 같이 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하기 때문에 이장의 동네 방송 전에 소식은 전해지게 되어 있다. 방송에서는 이장선거를 한다고 안 했지만 이장 선거를 하는 총회라는 것도 이미 다 알고 있다.
올해는 지방자치단체 선가가 있는 해다. 도회지에 살 때는 지방선거건 중앙선거건 정세가 어떻고 주체역량이 어떻고 하면서 새해 벽두부터 설왕설래 하지만 시골에 와서 산 지 16년이 되어 가다 보니 관심의 대상과 그 표현의 방식이 많이 달라졌음을 본다.

동네에서 왕성하게 얘기가 되는 것은 주로 군 의원 선거나 이장선거다. 군수 선거나 도의원 선거만 해도 동네 얘깃거리라기보다 신문과 방송의 화제가 된다. 그러고 보면 기초자치단체 단위가 시.군 으로 되어 있는 것을 읍.면으로 하향조정하는 것이 자치제도의 본령이라 하겠다.

이번에 우리 동네에서 치러진 이장선거를 보면 시골동네의 여론이 어떻게 조성되고 행사되는지 그 특징을 알게 된다.

올 해가 선거 년도인지 아닌지 관심도 없었는데 이웃집에 갔더니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제각기 지금 이장은 어떻고 누구네는 어떻고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벌써 2년 임기가 다 되어 또 이장 선거인가 싶었다. 집으로 전화도 걸려왔다. 선거 분위기가 나는 듯했다.


동네 총회는 한 해 가장 큰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라 어슬렁어슬렁 마을회관에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돼지도 한 마리 잡았고 방에는 따끈따끈하게 불을 넣어 아주 따뜻했다. 동네 개발위원장의 한 해 동네 살림살이 보고가 있었고 자질구레한 사항들이 하나씩 정해졌다.
예컨대 남자 하루 품삯을 얼마로 할 거냐, 우리 동네가 얼마라고 정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다른 동네 하는데 따라 맞춰야지 따로 할 수 없지 않느냐 등등.

동네 눈이 오면 버스 종점까지는 트랙터로 밀고 그건 동네 돈으로 수고비를 주되 골목이나 농로는 각 개인이 알아서 하자라든가 농기계 하루 임대료를 정할 것이냐 그냥 읍내 시세 따라 갈 거냐 하는 것들이다.


마을회관 분위기를 바꿔 놓은 것은 이장 선거 순서였다. 언젠가부터 동네 이장선거가 경쟁체제가 되었다. 슬그머니 뒤로 돌아앉아 수군거리는 이야기들도 생기고 누가 누구에게 술을 샀네. 누구는 알고 보면 빚이 많은 사람이네 하는 험담도 돌게 되는 게 요즘 이장선거다.

현 이장이 한 번 더 밀어 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했다. 그런데 반응이 별로였다. 보통 이렇게 되면 "구관이 명관이라 안 했어? 이왕 수고 하신 거 한 번 더 수고 해 주더라고"라든가 "한 해 고생 했구마. 자자. 박수로 통과합시다. 박수. 박수"하는 게 상례다.

이건 보통 분위기가 아니다. 어? 나 같은 숙맥이 모르는 어떤 소문이 동네에 한 바퀴 돌았나? 다른 사람이 새로 뽑히나? 벼라 별 생각에 흥미가 확 밀려왔다.

한 사람이 투표를 하자고 했다. 다들 그러자고 했다. 아니 다짜고짜 투표라니? 후보자도 없이? 그것도 "무기명 투표합시다"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의아했다. 언제는 공개 투표를 했었나? 내 궁금증과는 별개로 여기저기서 무기명 투표하자고 했다. 눈치도 없는 내가 이장 입후보 과정을 거쳐 투표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가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서로 감정 상하는데 무슨 입후보냐. 그냥 무기명 투표하자고 여러 사람들이 나섰다. 무 입후보 투표를 무기명 투표라고 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우리 동네에는 글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상당수 되는데 사회자는 속전속결로 사람들에게 이장으로 밀 사람 이름을 써 내라고 종이를 북북 찢어 돌렸다. 총 22명의 주민이 투표를 했다. 개표위원도 따로 없고 분위기를 주도 하는 사람들이 투표도 진행시키고 개표도 하고 집표결과도 발표했다. 중간에 현 이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투표를 강행한다면 자기는 이장 안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나같이 분위기 모르는 어떤 사람이 현 이장 표가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 결선투표제냐 종다수 득표제냐? 왜 입후보자도 없이 무슨 선거냐고 물었다가 된통 혼만 났다. "당신. 이 동네 이사 온 지 몇 년 됐소?"라고 쏘아 붙이는 사람도 있었고, "이사 들어 온 사람들 투표권 다 박탈해"라는 사람도 있었다. 분위기가 급박하고 일방적이었다. "이게 우리동네 헌법이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투표는 진행되었고 현 이장이 4표. 전 이장이 3표. 전혀 새로운 사람이 14표를 얻었다. 면장이 축하 차 와서 문 밖에서 기다리다 선거가 끝나자 들어왔다. 신협에서도 거름이나 비료 등 농자재 판매 목록을 잔뜩 인쇄 해 가지고 왔고 동네 할머니들이 마련한 술상과 밥상이 들어왔다.

동네에 무슨 바람이 분 모양이다. 아무 입후보자도 없었는데 전혀 새로운 사람이 과반수 득표를 했으니 뭔가 물밑 득표활동이 있었던 게 분명해 보이고 이런 식의 역모(?)가 왜 일어났는지 그 배경이 궁금할 따름이다.

시골 이장선거가 이렇게 되기도 하는 데는 꼭 이장노릇을 할 때 주어지는 반대급부가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남해군에서 이장을 하던 김두관씨가 노무현 참여정부 때 행정자치부장관으로 있으면서 이장의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들 말을 한다.
월급 20만원에 상여금 두 차례 20만원씩. 고지서 한 장 돌리는 데 5백 원에서 천원에 이르는 수당까지 지급할 뿐 아니라 중고등 학교에 다니는 자녀는 공납금 전액을 지원 해 주니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이것 때문에 시골동네가 선거 열풍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시골 동네 여론은 쑥덕쑥덕 하면서 만들어진다. 공개 토론이나 공청회 보다 뒷말들이 더 영향을 미친다. 이런 현상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갖는다. 아침 저녁으로 권력이 바뀌고 목숨이 오고가던 산악지역 마을의 모진 현대사 산물이기도 하다. 믿을 사람 아니면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심성들이.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다 있는 개발위원장이나 마을지도자, 부녀회장, 영농회장(현 농업경영인연합회), 노인회장 등 숱한 감투가 있지만 이장만 하지는 않다. 시.군 이장협의회 등에서 산업시찰이나 선진농업지 탐방 등도 이장에게 우선 돌아가는 혜택이다. 우리 군에서도 '이장자녀장학금지원조례'도 만들어져 있고 '이장 임명에 관한 규칙'도 있다.

조례와 규칙을 이미 알고 있는 나는 군 민원지원과에 물어봤다. 마을에서 뽑은 이장을 파면할 수 있는 권한이 왜 읍.면장에게 있냐고.

이장도 주민이 뽑는다고 이장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게 답변이다. 임명권이 읍.면장에게 있다는 것이다. 마을의 주민투표는 읍.면장에게 주민들이 이장 후보를 추천하는 절차에 불과한 것이라는 답변이다. 이래저래 참 이상한 이장 선거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일 멋>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일 멋>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장선거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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