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1] 지난 10년 간 성장률 예측치와 오차(단위: %, 오차는 절대값)
새사연
[표1]은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삼성경제연구원(SERI)이 지난 9년 동안 발표한 경제성장률 예측치와 실질 경제성장률을 비교한 것이다. 두 연구 기관 사이에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정확도를 논하기에는 오차가 너무 심하게 날 때가 많았다. 특히 2002년과 2008년의 경우에는 전망의 의미가 전혀 없었다. 2002년에는 KDI의 경우 3%, 삼성경제연구원은 4% 차이가 났다.
2008년에도 거의 비슷한 수준의 차이를 보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8년 10월에 발표한 2009년 경제전망에서는 3.6%의 성장률을 예측했다가, 미국 발 금융위기가 심화되자 2009년 2월 마이너스 2.4%의 수정치를 발표했다. 자제 성장률 예측 변화가 무려 6%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0.2% 정도일 것이라고 잠정적인 예측치가 나오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최초 발표한 예측이나 수정치나 모두 2.5%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이 정도로 신뢰성이 낮은 경제전망에 관한 보고서에 정부의 정책수립과 집행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그런데 왜 별 의미도 없는 성장률 예측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현 이명박 대통령이 7·4·7이라는 거짓 공약을 바탕으로 당선된 것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개도국에서 GDP 성장은 지배계급의 권력을 정당화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다. 박정희에 관한 신화도 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높은 성장률은 체제의 안정을 의미한다. OECD에 가입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성장 후분배' 정책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지배층에게 성장률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직접적인 정치·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배제해도 GDP에 관한 지표들은 많은 개념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GDP를 생산의 측면에서 보자면, 단지 최종 생산물의 시장가격을 총합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사회성원 사이의 분배문제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 가치도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를 2만 달러라고 치면, 현재 4인 가족의 평균소득은 8000만 원 가까이 돼야 한다. 현실의 평균소득은 절반도 안 된다. 길이 많이 막혀 차가 정체되거나 지체된 상태에서 태워 없애는 기름 값도 GDP에 포함된다. 산업생산으로 인한 환경파괴의 가치는 GDP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산림이 불타 없어지고 공장이 들어서면 GDP는 크게 증가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최근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 받아들여지면서 GDP를 대체할 경제지표 개발이 시도되고 있긴 하다. 프랑스 정부는 스티글리츠와 센 등 주류 경제학 내의 일부 비판적 경제학자들에게 위탁해 '경제 성과와 사회진보 측정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분배문제와 환경문제 등 삶의 질을 반영하는 경제지표를 만들려 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전망과 예측은 기존에 확립되어 있는 개념 틀 안에서 매해 연말에 성장률 예측치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사회 성원들의 삶이 개선될 수 있는 경제 개념을 확립해내고, 그에 알맞게 삶의 질이 얼마나 향상될 수 있는지 전망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은 2010년에 더욱 절실하다.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기아리기의 <장기 20세기>를 흉내내며 이 글을 시작한 것은 단지 멋을 부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 책에 펼쳐진 그의 주장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위기의 본성을 그 어떤 이론보다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1994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아리기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미국 헤게모니 하에서 펼쳐진 하나의 세계적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의미하며, 미국 패권의 쇠퇴와 헤게모니 이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본주의의 생성과 발전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결과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위의 책 영문판: ix-x). 금융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특정한 단계가 아니며, 최고의 단계나 최근의 형태는 더더욱 아니다. 금융자본주의는 중세와 근세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본주의 맹아단계부터 반복되어 나타난 현상으로서, 금융자본의 급격한 팽창은 세계적 차원에서 하나의 축적체제가 다른 축적체제로 전환할 시기가 고조되었음을 알려준다."
아리기에 따르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대공황 직전까지 펼쳐졌던 금융자본의 시대는 영국의 패권이 저물어간 시기임과 동시에 미국이 신흥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기 시작한 때이다. 그 후 과도기를 거쳐 미국은 산업과 무역을 주도하며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전후 호황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미국은 이전처럼 실물경제에 기반을 둔 축적체제를 계속 팽창시킬 수 없었다. 16~7세기의 제노바, 17~8세기의 네덜란드, 18~9세기의 영국 등 과거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패권국들이 겪었던 것처럼 실물과 금융의 이원화가 이루어지면서, 실물부문의 중심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금융의 비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금융부문의 팽창은 어떤 면에서는 헤게모니 국가의 힘이 강해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실물-상업(무역)-금융-군사의 순서로 차례로 이루어지는 패권 이동의 한 국면이라고 아리기는 주장한다. 현재 G2로 부각되며 날로 강대해지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 어쩌면 아리기의 역사적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새로운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금번 미국 발 세계 경제위기가 미국의 패권의 급격한 쇠퇴를 알리는 신호일 수도 있다.
팍스 아메리카를 대체할 새로운 패권형태가 어떤 것일지는 아직 미지수다. 역사가 일정한 패턴을 반복만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다수의 국가들이 헤게모니를 구성하거나, 초국적 헤게모니가 구성될 수도 있다. 2009년 위기관리 체제로서 출발한 G20이 평상적인 기구로서 정착하면서 로마제국에서 원로(Senate)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권력기구 역할을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0년 6월 캐나다, 11월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인 G20정상회의의 내용에 따라 향후 세계 정치경제의 헤게모니가 어떻게 형성될지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 상황의 본질적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확인되겠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경제적 위기가 금융패닉이 안정되었다고 해서 이전의 상태로 쉽게 돌아갈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한 세기 이상동안 생성-발전-쇠퇴의 경로를 밟은 하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다른 형태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고, 이 시기는 꽤나 길게 지속되면서 큰 변동성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1년 단위의 성장률 계산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아리기가 오래 전에 예견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는 단지 미국의 패권이 약해지기 바라는 좌파 학자의 근거 없는 희망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주류 경제지인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의 대표적 칼럼니스트이며 편집자이기도 한 마틴 울프(Martin Wolf)는 최근에 쓴 'New Dynamics'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번 위기가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의 몇 가지 중요 특성을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마틴 울프의 의견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첫째,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의 금융모델의 패권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둘째, 금융규제 강화는 불가피하다. 여러 금융규제 장치들이 개혁될 것이고,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과 감시가 강화될 것이다. 셋째, 금융의 세계화가 당연시 여겨지던 시대도 끝나게 될 것이다. 넷째, 글로벌 스탠더드가 경쟁적 규제완화에서 규제의 세계화로 대체될 것이다. 다섯째, 자율적 조정 시장의 원칙이 더 이상 막무가내로 관철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섯째, 패권적 금융모델이 무너졌기 때문에 각국의 고유한 전통과 목적에 맞는 금융체계가 부각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경제의 중심지가 중국을 위시로 한 신흥국 쪽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IMF 총재 스트로스 칸도 YTN과 가진 2010년 전망에 관한 단독 인터뷰에서 위와 같은 방향으로 국제 금융질서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2010. 1. 1).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 여부는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가질 것이며, 누구에 의해 주도될 것인가이다.
유연성에서 안정성으로 신자유주의의 중심 화두는 유연성이었다. 지배적 자본이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서 이윤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회적 요소들을 유연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를 위해 국가적 장벽을 허물었고, 공공소유로 남아있던 중요한 사회적 자산을 사유화 했으며, 사회안전망을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더불어 인간을 생산의 투입요소로 간주하는 경제학 이론을 현실화시켰다. 그로 인해 대다수의 서민들은 안정적으로 삶을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비정규직이 양산되었고, 실질임금은 정체되었다. 고용의 안정성이 파괴됨과 동시에 사회안전망이 약화되면서 삶은 이전보다 불안정해졌다.
선진국의 민중들은 기존의 사회안전망이 공격받긴 했지만 완전히 와해된 것은 아니었기에 신흥국이나 가난한 나라들의 민중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낳은 삶의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국들은 미쳐 사회안전망이 확립되기도 전에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질서가 도입되면서 민중들의 삶이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개발독재의 시대에서 아주 잠깐 동안 노동조건의 개선 시기를 거치고 바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겪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체제가 완성되기 전에 신자유주의의 붕괴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지속될 수는 없다. 민중들의 저항에 의해 이런 결말에 도달한 것이 아니어서 아쉽지만, 미국 발 세계 경제위기로 인해 그 패러다임을 주도했던 자들 스스로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기본원칙인 유연성은 소수의 대자본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지구 전체를 구조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여러 불안정한 요소들이 있지만, 그 중 신자유주의 주창자들이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소위 "혁신적 금융기법"에 기반을 둔 금융시스템이 붕괴하고 말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전의 체제를 지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경제화두는 안정성이다. 새로운 세계체제를 논의할 주요 장이 될 G20의 중심 의제도 체제의 안정성이다. 그렇지만 G20이 안정성이란 화두를 신자유주의에서 집중 추구한 노동의 유연성 문제나 공기업의 민영화 문제에까지 적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들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문제점으로 인정하는 것은 금융체제의 불안정성이고 현재 추구되고 있는 안정성은 이 분야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안정성이란 화두를 금융시스템에 국한하지 않고 고용문제를 비롯해 사회 전 분야로 확산시키는 것이 일국적 차원과 세계적 차원에서 진보진영의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