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너무나 반들해진 어머니의 손
김수복
손톱이나 발톱에 흥미를 갖고 들여다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손에는 손톱이 있고, 발에는 발톱이 있으며,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있는데 귀에는 왜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놓고 밤잠을 못 잔 시절도 있었다. 그때 찾은 답이라는 것이 이렇다.
머리는 단독으로 헤딩 같은 것을 할 수 있고, 발도 단독으로 뭔가를 할 수 있으며, 손도 역시 능동적으로 뭔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부속이지만, 귀는 절대로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오직 들어오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기관이기 때문에 별도 방어기제가 필요치 않다는, 지금 생각하면 입에서 절로 피식 소리가 나오는 해답이지만, 그때는 사뭇 위대한 발견이라 여기며 우쭐대기도 했었다.
먼 옛날, 인류의 직립보행을 전후한 시기에 손톱이나 발톱은 필경 공격과 방어에 유용한 무기였을 것이다. 식량을 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연장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손톱을 깎다 보면 내가 마치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아무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공격할 이유도 없고 공격할 만한 적도 없다는 선언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손톱을 깎는 행위에서 느끼는 안정감은 어쩌면, 순수하게 더불어 살고 싶다는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편안감인지도 모르겠다.
싸워야 할 적도 많고, 보여야 할 위엄도 많았던 고대 왕들은 손톱을 치장하는 일에 상당히 많은 공력을 들였던 것 같다. 특히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의 황제들 이 손톱을 어떤 상징으로 활용했는가는 남아 있는 여러 형태의 그림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네일숍을 찾는 현대의 수많은 선남선녀들은 바로 그 왕의 후손들인지도 모른다. 하긴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누구인들 왕가와 인연 없는 사람이 있으랴. 하다못해 단군할아버지의 후손이라는 공인(?)된 문헌을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겠으니 말이다.
어머니가 젊었던 시절에 손톱은 분명 하나의 훌륭한 연장이었다. 이가 많았던 시절에는 서캐와 이를 툭 툭 눌러서 죽이는 무기이기도 했다. 무기나 연장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손톱이든 발톱이든 굳이 따로 시간을 내어 깎을 필요가 없었다. 밭에서, 논에서, 산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 보면 손톱이든 발톱이든 절로 닳아서 없어졌다.
손톱이 그렇거늘 손인들 깨끗하고 매끄러울 리 없었다. 농번기 내내 혹사를 당한 손등은 겨울이면 쩍쩍 갈라져서 피가 비쳤다. 서울로 시집간 고모나 사촌 누나들이 이따금 사다 주는 콜드크림 같은 것들은 화장품이라기보다 갈라진 손등을 치유하는 약품으로나 유용하게 쓰였다.
그렇게 훈련되고, 그렇게 길이 들여진 어머니는 손이 험한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깨끗해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자식들이 어쩌다 어머니 손이 너무 험해서 창피하다고 투정이라도 부릴라치면 어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는 정말로 창피한 것은 손이 아니라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큰소리도 아니고 나직한 목소리로 가만히 마치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손발이 터서 갈라지고 핏기가 비친다는 것은 놀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이고, 놀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은 아프지 않고 건강하다는 것이며, 아프지 않고 건강하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발이 험하다는 것은 도둑질이나 사기질에는 관심도 없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증거인 것이니, 꿈에서라도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고 자랑스러워 할 일이라는 어머니의 일관된 주장 앞에서 자식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