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
MBC
드라마 <선덕여왕>이 7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이번 주에 막을 내린다. 이제 남은 이야기는 '비담의 난' 하나뿐이다.
'여왕은 무능하다'는 당태종의 논리를 흉내 내며 비담이 배반의 칼날을 높이 쳐들자 김춘추·김유신이 그 칼날을 내리치고 이 와중에 병약한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등극한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실린 비담의 난의 줄거리다.
서기 647년 비담의 난은 선덕·진덕 교체기에 발생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시간적' 함의를 갖는 사건이지만, 유라시아 대륙 곳곳의 여러 공간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일으킨 결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간적' 함의를 갖는 사건이었다.
공간적 함의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정변은 유라시아대륙 중앙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민족들 간의 상호작용이 일으킨 '나비의 날갯짓'이 유라시아대륙 최동단에 있는 신라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소위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유라시아대륙 중앙에서 발생한 사건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연쇄적 인과관계를 일으키며 유라시아대륙 최동단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유라시아대륙이 공간과 시간의 측면에서 긴밀한 상호작용 즉 인과관계의 연쇄 속에서 작동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과관계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지구상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의 인과관계를 무한정 확대해서 과거로 한참 소급하다 보면, 결국에는 아담과 이브가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비담의 난이 있기까지의 모든 사건들을 인과관계로 연결하다 보면, 결국에는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비담의 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하여 형법학에서는 법률적 책임을 지우는 인과관계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한정하고 있다. 예컨대, "100년 전에 사망한 A는 우리 역사에 중대 과오를 범했다"는 내용이 담긴 B의 저서를 읽은 독자 C가 격분하여 A의 자손인 D를 폭행했을 경우에, 자연과학적으로 따지자면 B의 집필이 C의 폭행에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형법에서는 B의 집필과 C의 폭행 사이의 인과관계를 원칙상 인정하지 않고 C에 대해서만 법적 책임을 묻는다.
비담의 난을 가져온 7단계 인과관계
마찬가지로, 비담의 난과 관련하여서도 인과관계의 범주를 그처럼 합리적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서 비담의 난 이전의 사건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로부터 6년 전인 641년부터 유라시아대륙 차원에서 발생한 7단계의 사실관계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비담의 난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제1단계] 당태종의 중화주의제1단계는 당태종의 동방정책의 개시(641년). 중국이 분열 양상을 보인 5호 16국 및 남북조 시대(4~6세기)만 해도, 중국 왕조들은 외부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에게 무리한 복속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면서부터 상황이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철철 넘친 당나라가 이웃나라들을 도호부(都護府)라는 자국의 행정체계 안에 편입시키려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것은 미국이 소위 불량국가 혹은 악의 축들을 상대로 "너희는 미국의 한 주(州)가 되어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신개념의 중화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인물이 바로 당태종이었다.
그처럼 오만한 중화주의가 국제사회의 환영을 받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무력으로 국제사회의 반발을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강대국들이 밀집한 중앙아시아 쪽과 동북아시아 쪽을 동시에 상대해서 당나라가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다.
양쪽을 상대로 윈-윈(2개 지역에서의 동시 승리)을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한 당태종은 630~641년 기간에 돌궐·토욕혼·고창국을 격파하고 토번(티베트)과 화친을 맺음으로써 중앙아시아 쪽을 자기편으로 만든 다음인 641년부터 동북아시아 쪽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 쪽에서 한숨을 돌린 당나라가 동북아시아 쪽에 전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라 당태종이 의욕적으로 동방정책을 개시함에 따라 641년부터 한반도 및 요동(만주)의 정치질서가 급격히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동북아시아 정치질서의 급변이 아래와 같은 인과관계를 거쳐 신라 정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제2단계] 백제·고구려 강경파 정권 출현제2단계는 백제·고구려의 반작용. 당태종의 동방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백제·고구려에서는 강경파 정권들이 출현했다. 641년과 642년에 각각 등장한 의자왕 및 연개소문 정권은 당나라의 세계전략에 맞서 정면 도전의 의사를 표명한 정권들이었다.
이렇게 새로 등장한 두 정권은 대당(對唐) 투쟁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당나라의 우방인 신라를 한층 더 압박하고 나섰다. 642년에 의자왕이 신라로부터 40개의 성을 빼앗은 데에 이어 불과 한 달 만에 대야성까지 쟁취한 것은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대야성 전투 이후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김춘추를 고구려 측이 연금한 것도 동일한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3단계] 신라의 사대주의 강화, 김-김 콤비 전면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