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론> 겉그림.
지만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모든 인간 행동은 기독교적인 관점과 로마적인 관점, 양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로마인이 높게 평가하는 것(돈을 모으고 별장을 짓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하찮은 것이며, 새로운 관심, 즉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과 자선을 실행하고,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가지 가치 체계를 각각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로 표현했으며, 이 두 도시는 심판의 날까지 공존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구분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통적인 기독교 사고의 중심에는 지위에 도덕적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바탕을 이룬다. 예수는 종교적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목수였다. 빌라도는 제국의 총독이었지만 죄인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개인의 자질을 반영한다는 주장은 기독교 세계에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는 위계의 개념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했을 뿐이다. 기독교가 지배적인 유럽에서도 지위가 혈연에 따라 분배되었으며 세습되었다.
새로운 능력주의 세계관의 출현 세습주의를 기초로 한 지위 체계가 지배하던 상황은 18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능력이 없는 자들의 세습적 지위 획득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 이데올로기는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법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공교육이 확대되고, 시험에 의한 인재의 등용이 일반화해 갔다. 이뿐만 아니라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세습주의 사회에서 지위는 자신의 혈연적 배경만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이제 부가 품성의 온당한 지표로 여겨질 수 있게 되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세기, 특히 미국에서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부(富)'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 미국의 개신교파들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세속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는 토머스 P. 헌트 목사가 1836년에 낸 베스트셀러 <부에 대하여 : 부자가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라는 사실은 성경이 증명한다>에도 반영되어 있다. 존 D. 록펠러는 부끄러움 없이 주님이 자신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능력주의 세계관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세속 도시'와 '신의 도시'의 구별이 의미를 잃는다. 이제 '세속 도시'에서의 성공과 부는 도덕적이면서 경건한 인간에게만 찾아온다, 아주 가끔 시편 저자와 마찬가지로 악한 자가 번창하는 것을 보기도 하나, 그것은 드문 일이 된다.
경제적 능력주의와 빈자에 대한 자비심 경제적 능력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어떤 영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 '불운하다'가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되었다. 따라서 빈자들은 부자들의 자선과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었다. 억척스럽게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눈에는 빈자들이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능력주의 세계관에 과학적인 정당성을 제공한 것이 이른바 19세기 <사회적 진화론>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적 부와 가난의 분배가 '적자생존'이라는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정의롭게 이루어진다.
이에 더 나아가 사회적 진화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과 짧은 수명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며, 따라서 정부가 개입해서 막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영국의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는 <사회 통계학>에서 생물학적 원리 자체가 '자비'라는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미국의 대중 설교가 헨리 W. 비처 목사는 <진화와 종교>에서 스펜서의 교의가 '신의 도시'에서도 관철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그는 사회적 진화론이 신의 의지에 대한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비'에 대한 스펜서의 견해는 미국의 재계와 교계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기부'로 유명한 미국의 거부 앤드류 카네기도 실제로는 사회복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선으로 먹여 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무익한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근면한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고 말하였다.
로마인이 '요란한 선행'을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