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내부고흐가 근처 밀밭에서 권총자살을 하기 직전 2월 반 정도 머물며 70여 점의 그림을 그리면서 마지막 삶을 불태운 곳으로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박태상
마을 도처에는 고흐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애정 어린 손길이 남아 있다. 그 중 하나가 고흐 공원이다. 유치하기는 하지만 화구를 매고 서 있는 고흐의 동상이 공원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다. 사실 공원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흔적이 거의 없는 곳이니 더욱 고흐의 동상이 외롭게 느껴졌다. 죽어서도 고흐는 외롭기만 한 것일까?
사실 고흐만큼 외로웠던 예술가도 드물다. 고흐에게는 여복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의 삶을 살펴볼 때 독자들이 재미에 빠지게 되는 것은 파란만장한 여성 편력 등의 낭만성 때문이다. 요즈음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와 관련되는 섹스 스캔들에 전 세계 호사가들이 입맛을 다시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고흐의 전기적 생애에서는 그러한 묘미를 느낄 수 없다. 고흐의 생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1930년대 식민지시대 작가 김유정처럼 '짝사랑'밖에 없다. 런던에서의 하숙집 딸 외제니 오이어와 요절한 목사의 미망인으로 나타난 사촌 케이 보스 스트리커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하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한다.
심지어 고독했던 화가 고흐는 한 창녀에게 빠져 청혼하기까지에 이른다. 1881년 8월부터 넉 달 동안 고흐는 헤이그의 모베의 화실에서 같이 보낼 때, 창녀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니크 즉 시엔을 만나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와 테오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하면서 생활비마저 지급을 중단한다. 창녀 시엔은 고흐의 삶의 고통 속에서 <슬픔>이라는 1882년 작품으로 부활한다.
고흐가 자살했던 집의 뒷골목을 따라 길을 올라가면 오베르 교회가 나온다. 유명한 고흐의 그림인 '오베르 교회'의 배경이 된 명소이다. 몇 년 동안 공사 중이어서 오베르교회는 고흐 그림의 원형으로서 사진에 그대로 담는 데 어려움이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