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생일선물 '쇠고기 한 근'도 괜찮네!"

동갑내기 아내의 59회 생일을 축하하며

등록 2009.12.13 14:07수정 2009.12.1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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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은 동갑내기 아내의 59회 생일이었다. 아내는 '생일복'이 없는 사람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생일이 하루 빨라 40대 후반이 되도록 생일을 찾아 먹지 못했다. 생일날 아침부터 형님 댁으로 시어머니 생신 음식을 만들러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아내 생일에 신경을 쓰는 편이어서, 지난달부터 달력에 표시해놓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마땅한 선물이나 이벤트를 정하지 못했다. 요놈의 선물이 부산에 다녀오던 전날(10일)에도 문득문득 떠올라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수원에서 내려온 손님도 있으니까 군산에 도착해서 백반이라도 대접하든가,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마시고 헤어져야 했다. 그런데 밤 11시에 퇴근하는 아내를 생각하니까 그럴 수가 없었다. 해서 아쉬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중간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해서도 아내 생일선물 생각뿐이었다. 아내가 퇴근하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말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나이가 드니까 아이디어도 고갈된 모양이라며 "아이고,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하고는 포기해버렸다.   

모두 포기하니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편했다. 마음이 홀가분하니까 지난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는데, 중학생 딸과 5천 원짜리 케이크를 자르며 '생일 축하송'을 부르고, 3천 원짜리 냉면을 시켜먹으면서도 행복해 했는데, 값나가는 신제품 타이프라이터를 선물하고도 티격태격하던 일들이 생각나 쓴웃음이 지어졌다. 

고소하고 애틋했던 추억여행을 하다 보니까 11시가 넘는 줄도 몰랐는데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움직임이 느껴지기에 문을 열고 나가며 "안나 엄마야?"라고 물었더니 유쾌한 목소리로 "예!"라고 하는데 표정이 무척 밝았다.


결국, 아내 생일 전야제는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채 군밤을 까먹으며 "내일 자기 생일은 둘이서 조용하게 보내자고!"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내가 "그래요. 둘이 조용하게 저녁이나 먹어요"라고 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모 사이트에 연재를 시작한 딸의 만화 이야기부터 큰 누님 면회 다녀온 얘기, 아내 직장 얘기, 형제들 소식 등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아내가 딸이 올린 만화를 감상하겠다며 컴퓨터 앞에 앉고,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쇠고기 한 근'을 생일선물로 결정

아침에 눈을 뜨니까 아내는 그때까지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모으며 딸이 올린 만화가 사라졌다고 속상해했다. 처음 올리는 거니까 변동이 있을 거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으나 연재를 1개월 연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심이 되는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게 부모 마음.

 아내가 끓인 미역국, 쇠고기를 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 미역국은 개운한 맛과 고소한 맛의 조화가 일품이지요.
아내가 끓인 미역국, 쇠고기를 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 미역국은 개운한 맛과 고소한 맛의 조화가 일품이지요. 조종안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주방에 들어가 무엇을 해먹을지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지만, 생일날 아침에 미역국보다 잘 어울리는 반찬이 없을 것 같았다. 해서 미역은 준비해둔 게 있으니까 쇠고기하고 양념만 있으면 되겠기에 정육점으로 달려갔다.

정육점에서 쇠고기 한 근하고 파 한 단을 사 들고 오는데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고민 시작 한 달여 만에 '쇠고기 한 근'을 생일선물로 결정한 것이다. 아내에게 "올해 자기 생일선물은 '쇠고기 한 근'이야!"라고 해도 서운해 하거나 투정을 부릴 것 같지 않아서였다.

매월 아내에게 생활비로 25만 원씩 받는데, 각종 찬거리와 교통카드 입력, 소규모 경·조사비에 어쩌다 군것질도 하고 자장면도 사먹으면서 반가운 지인을 만나면 소주라도 한 잔씩 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다. 해서 계획에 없는 지출은 1만 원도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다. 그래서 마음이 담긴 쇠고기 한 근도 적잖은 선물이 될 거로 생각하고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아내를 불렀다.

"어이, 오늘이 자기 생일이야 축하해, 그리고 아침에는 미역국이나 끓여 먹자고, 미역은 집에 있으니까 자기에게 생일선물 하는 셈치고 쇠고기 한 근 사왔거든. 대신 내 솜씨가 부족하니까 국은 자기가 끓여야 되겠는데···."

잠에서 막 깨어 눈을 부스스 뜬 아내는 "축하는 무슨 축하요 쑥스럽게, 그리고 무슨 미역국을 끓인다고 쇠고기를 사와요. 하긴 생일날 아침에 미역국 끓여 먹는 것도 괜찮지···"라며 주방으로 가더니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1차 부도위기를 넘긴 가난한 회사 사장님 심정으로 서재에서 자료를 정리했다.

조금 있으니까 "안나 아빠, 식사하세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고마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아내 생일선물로 쇠고기 한 근도 괜찮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편, 아내가 부도위기를 막아준 거래처 여사장님처럼 고맙게 느껴져 언젠가는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내와 마주앉아 고소하면서 담백한 미역국을 먹으면서도 "하따! 쇠고기가 생각보다 비싸데, 추석 때도 한 근에 1만 5천 원이었는데 오늘은 1만 7천 원이야, 1만 7천 원···"이라며 오른 쇠고기 값을 되뇌었다. 선물이 비싼 거라고 하면 미안함이 덜해질 것 같아서였다.
 
형님의 저녁 초대

밥을 먹는 중에도 아내 전화벨이 자주 울렸는데 생일을 축하한다는 전화인 모양이었다. 조금 있으니까 집 전화기 벨이 울리기에 받았더니 형님이었다. 형님은 아내 생일이 맞는지, 집에 있는지 등을 확인하더니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했다.

 건배를 마치고 매운탕을 권하는 형님과 셋째누님. 작년 아내 생일에도 초대해서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준 형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건배를 마치고 매운탕을 권하는 형님과 셋째누님. 작년 아내 생일에도 초대해서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준 형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종안

형님은 항상 얻어먹기만 해서 내는 거라며 고급 음식점은 못 가고 시래기 매운탕 집을 예약해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시래기 매운탕도 장난이 아니다. 1인분에 8천 원인데 한 번 모이면 셋째 누님과 동생 부부, 조카 부부까지 부르니까 10명이 넘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주와 맥주 음료수까지.

아무래도 생일선물이 미약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형님이 체면을 세워주는 것 같아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저녁 6시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에게 형님이 저녁을 초대했다고 하니까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었다. 나도 어린아이처럼 덩달아 기쁘고 뿌듯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약속시간이 되어 형님 내외를 모시고 은파 유원지에 있는 '궁전 쏘가리 매운탕'으로 향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옛말이 머리를 스치면서 잠시 행복감에 빠지기도 했는데, 식당에 도착하니까 셋째 누님과 조카며느리는 이미 와있었다. 

'궁전 쏘가리 매운탕' 식당에서

 쏘가리 매운탕과 돌솥밥. 후식으로 먹는 누룽지 맛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부엌에서 일하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지요.
쏘가리 매운탕과 돌솥밥. 후식으로 먹는 누룽지 맛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부엌에서 일하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지요. 조종안

 시래기와 쏘가리를 안주로 마시는 ‘소맥’은 뱃속을 청소해주고 시원하게 하는 청량제 역할은 하지요. 석 잔까지는 약인데 그 이상은 역효과가 나더군요.
시래기와 쏘가리를 안주로 마시는 ‘소맥’은 뱃속을 청소해주고 시원하게 하는 청량제 역할은 하지요. 석 잔까지는 약인데 그 이상은 역효과가 나더군요. 조종안

예약을 해서 그런지 음식상이 바로 차려졌다. 매운탕도 얼큰하고 개운했지만, 적당히 익은 열무김치와 좋아하는 검은콩이 몇 개 박히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돌솥밥이 입맛을 당겼다. 조금 있으니까 동생 부부가 도착해서 아내 생일을 축하하는 건배를 했다.

동생이 밥을 먹다 말고 황급히 밖으로 나가 예쁜 가방을 들고 오더니 기훈이 엄마(제수)가 준비한 선물이라며 아내에게 세련미가 넘치는 머플러를 선물했다. 그러자 셋째 누님이 하얀 봉투를 살짝 밀어 넣어주었는데, 아내는 활짝 웃으면서 "일 년 내내 생일이었으면 좋겠네요!"라며 흡족해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아내가 서울에 있는 딸이 밤늦게 온다고 했다. 딸이 온다는 말에 기쁜 나머지 평소 마시지 않던 '소맥'(소주·맥주를 합한 술)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는데, 시래기와 쏘가리를 안주로 하니까 입이 개운하고 소화도 한층 잘 되는 것 같았다. 

매운탕을 맛있게 먹고 식당을 나오니까 조카며느리가 "삼촌, 식사만 하고 이대로 헤어지면 너무 서운하잖아요!"라고 하기에 "그럼 어디 커피숍에 들어갈까?"라고 했더니 자기 아파트로 오라고 했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아파트가 있어서 잠시 들렀는데,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나눴다. 지난달에 돌아가신 셋째 매형 이야기가 나와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지기도 하고, 식당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다가 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59회 생일에 나는 '쇠고기 한 근' 선물한 것밖에 없다. 그것도 궁여지책으로. 하지만, 형제들이 챙겨주어 즐겁고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는데, 아내 생일을 축하해준 모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내생일 #미역국 #저녁초대 #생일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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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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