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평전
돌베개
다시 시간을 거슬러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한 청년이 스스로 몸에 석유를 뿌리고 성냥불을 댕긴다. 전태일, 그 역시 1986년의 권인숙처럼 22세의 청년이었다. 화염 속에서 비틀리는 그의 손에는 근로기준법 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동료들이 전태일의 몸에 붙은 불을 껐을 때 이미 그는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전태일은 동료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호소하고는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던 의식의 가닥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분신 이후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조영래는 그 중 대표적 인물이었다.
장기표에게 연락을 받은 조영래가 잠시 사법시험 공부를 제쳐두고 나타났고 이어서 대학원생 최종고가 합류한다. 영락교회 청년회장으로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최종고는 교회가 전태일의 시신을 거두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러 교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갖가지 이유로 거절당하고 만다.-안경환 저, <조영래평전>일주일 후인 11월 20일 서울대 법대에서 전태일 추도식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는 "전태일을 죽인 박정희 정권·기업주·어용노총·지식인·모든 사회인 등 5대 살인자"를 고발하는 시국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결코 한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이를 계기로 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권 수호를 위한 범국민적 운동을 제안한 이 선언문의 초안자는 바로 조영래였다.
이듬해 조영래는 사법시험 합격생으로서 법률가로서의 삶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4월 어느 날 그는 <동아일보>에 실린 작은 글 하나에 눈길이 쏠렸다. 그 글은 전태일의 죽음에 냉담한 한국 사회를 질책하고 있었는데 기고자는 뜻밖에도 이화여대 학생이었다. 부끄러움을 느낀 조영래는 이 '기특한 여학생'을 수소문하여 찾아 만난다. 여학생의 이름은 이옥경, 이후 부부가 된 두 사람의 중매인은 결국 전태일이었던 셈이다.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 조영래의 노력은 <전태일평전> 집필로 구체화된다. 그는 장기표를 통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준 전태일의 수기를 입수한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수배 중에도 청계천 노동자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평전 집필을 계속해 나갔다.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변치 않고 진지하며 겸손한 조영래에게 청계천의 어린 노동자들은 하나 같이 우정을 느꼈다.
1978년 <불이여 나를 감싸 안아라>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초간된 <전태일평전>은 이후 1983년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라는 엮은이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출판된다. 이 책은 당국에 의해 출판과 판매가 금지된 채로 지하 루트를 통해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전태일평전>은 명저로 부각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집필자가 조영래인 것은 알지 못했다.
이후 <전태일평전>은 저자 이름 조영래를 밝히면서 출간되어 '시대의 무거운 문서'로서 오늘날 새로운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집필자인 조영래는 자기 이름이 박힌 책을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이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